가난했던 어린 날 외 1편
서상만
학급비 납기를 세 번이나 미룬 날, 나는 밤새도록 그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학급비를 갖고 학교에 가야 한다, 선생님과의 삼세 번째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우울과 공포 때문에 아침밥도 거른 내 독특한 표정이 곧바로 어머니한테 전달되었다
그런 나의 성화에도 '오늘은 안 된다, 집안에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다 아이가 만아 내가 오늘 꼭 준비해 볼 테니 오늘은 마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내일은 꼭 가져오겠다고 말씀드려라'고 무척 단호하셨지만 나는 같은 말을 너무 자주 들은 어머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 드디어 나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실,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읍소작전이다 울음의 음률은 고음도 아니고 저음도 아닌 제법 부드럽기도 한 평상 음이랄까, 그러나 끊어지지 않도록 부단하고 처절하게 에 에 우는 것이었다
어린 내가 농지개혁 이후 소작인에 빼앗긴 부농의 상실감에 넋을 잃은 집안의 답답한 심정을 어디 알기나 했을까 어머니는 단호하게 '그래 오늘은 학교 가지 마라' 하시고는 방에 들어가셨다 나는 은근히 화가 나서 대문 밖에 깔린 돌멩이를 집어 집안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땅땅 소리가 커지며 드디어 장독대 장독 하나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방 안에서 어머니가 놀라 마당으로 나오셨고 잠시 후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뒤를 이어 나는 부리나케 학교로 달려갔다 선생님의 혹독한 꾸중보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귀에 걸렸다
-전문(p. 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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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임종
아, 맥없이 잡았던
내 손을 슬며시
풀어주시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왜 이러시죠
정신 차리세요
어머니, 나는
어머니 가시는 길
어딘지도 몰라요
조용히 조용히
숨소리 거두시고
눈을 감는 어머니
-전문(p.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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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생존연습生存練習』에서/ 2024. 3. 20. <미네르바> 펴냄
* 서상만/ 경북 포항시 호미곶 출생, 198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사금파리』『그림자를 태우다』『모래알로 울다』『적소』『백동나비』『분월포芬月浦』『노을 밥상』『사춘思春』『늦귀』『빗방울의 노래』『월계동 풀』『그런 날 있었으면』『저문 하늘 열기』『포물선』등, 시선집『푸념의 詩』, 동시집『너 정말 까불래?』『꼬마 파도의 외출』『할아버지 자꾸자꾸 져줄게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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