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수메르 외 1편/ 김건희

검지 정숙자 2024. 4. 1. 01:14

 

    수메르 외 1편

 

    김건희 

 

 

  앞섶 단 추 하나 뚝 떨어져

  신전 계단 아래로 굴러간다

 

  그의 과거를 알고 싶거든

  점토판 쐐기 문자를 조금씩 더듬어 봐

 

  한곳에 머물기를 거부한 단추, 이해하는 순간

  진흙에 꽂힌 문자는

  표창이 되어 네 가슴에 꽂히게 될지도 몰라

 

  신전에 갖다 바친 양 일곱 마리

  움푹해진 눈동자로 뛰어나올지도 몰라

 

  진흙 바닥을 막대기로 긁다

  죽은 술사가 네 머리에 독약을 뿌리더라도

  벌떡 일어나지 마

 

  기도의 방으로 들어가

  함부로 신들을 불러내지는 마

 

  캄캄해지는 눈앞의 순간이

  성벽처럼 가로막을 떄

  당당히 일어나 휘파람을 불어 봐

     -전문(p.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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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수리 경전

 

 

  저무는 숲에 갔다가 탁! 탁!

  도토리에게 얻어맞았다

 

  나를 치고 동화사 돌계단을 굴러 내려간다

  놀라 눈 뜬 다람쥐에게 남기는 화두

 

  대웅전 용마루 마주 보며 백 년쯤은 살았으니

  그도 나름 깨달았겠다

 

  발아래 관 자리 하나쯤 봐 두고

  애 끓이던 열매 하나둘 떠나보내고 있다

 

  눈물 섞어 묵을 쑤어도 그만인 도토리

  흔들리던 허공을 다람쥐가 끌고 가서

  불혹 넘긴 내가 애꿎게도 아프다

 

  큰 나무 그늘에서 멀리 떨어지라는 스님의 설법

  타임머신을 숨긴 어린나무가 받아 적는다

 

  여시아문 꽃살문도 흔들린다

      -전문(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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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오렌지 낯선 별에 던져진다면』에서/ 2024. 3. 11. <상상인> 펴냄 

  * 김건희2018년 『미당문학』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등단, 시집 『두근두근 캥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