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
『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 부분들
이재은 외
* 이재은_「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中
열다섯의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박분분의 손에 맡겨졌다. 박분분은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천 원 이천 원을 쥐여주거나 그녀의 지갑에서 잔돈을 흠쳐 하드를 사 먹고 돌아오는 일탈을 눈감아주었다. 나는 캄캄한 방에서 눈 감는 일을 무서워했는데 박분분이 배를 문질러주면 조금 안락해졌다. 껍질을 칼로 깎았는데도, 그래서 과도가 눈앞에 있는데도 박분분은 입으로 과실을 베어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그런 박분분에게 의지했다
내성적이고 붙임성이 없었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바깥세상을 탐하기보다 책에 빠져 살았다. 소설은 나를 고독하고 안전하게 놓아둘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다. 경험을 대신해주었기에 나는 간접적으로 세상을 접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p. 21)
★이재은/ 2015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비 인터뷰』『1인가구 특별동거법』『짧은소설 가이드북』(공저) 등
* 김경은_「카페 캠프마켓」中
병을 기울여 샷 잔에 몰리는 꼴꼴꼴꼴 소리를 듣노라면 하루의 피로가 날아갔다. 션은 엄지와 검지로 샷 잔을 잡고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랐다.
션이 처음부터 위스키 성애자였던 것은 아니다. 술이면 다 되지만 주로 맥주를 마시는 머글 애주가일 뿐이었다. 누구나 시작은 있게 마련이고 그 시작은 서툴 수밖에 없다. 션과 연은 가게를 그렇게 시작했다. 아무리 구멍가게 규모라지만 경영이라면 경영인데, 사업도 멋도 모르고 시작한 것이다. 무모한 결정을 내린 자신의 용기를 션은 밤마다 위스키 한 잔을 들어 칭찬했다. (p. 39)
★김경은/ 2005년 『실천문학』, 『절연구간 건너기』로 등단, 단편 『민원 있습니다』『아이네아스 밤의 나라』『노래』『나타나다』등, 에세이 공저 『어서 오세요 쨈지달입니다만』
* 황경란_「슬로우 슬로우 퀵」中
"여기서 중요한 건 내적 필연성이래.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이 기억하는 소설 속에는 내적필연성이 들어 있다는 거야. 그런데 이러가면 난 자신있어."
(···)
"내가 서 있는 곳은 도로가 아니면 골목 위야. 도로에서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골목에서는 사람들이 비켜나길 기다리지. 그리고 출발. 직진만이 존재하는 길은 없어. 말하자면 도로는 때로 골목과 같고, 골목은 때로 도로와 같아. 그래서 언제나 나는 '슬로우 슬로우 퀵'이야. 이것이 내가 여기를 떠나 소설을 써야 하는 내적 필연성이야." (p. 78)
★황경란/ 2006년 토지문학제 평사리 문학 대상「보뚜」로 작품 활동 시작, 2022년⟪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동물 환상국」당선, 소설집『사람들』
* 최경주_「이명 그리고 눈두덩」中
"아니에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기능공이고 숫자를 믿고 숫자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을 대충 조지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삼성에서 일 안 해 보셨어요? 아, 그 친구들이 일을 일같이 하는데."
(···)
노동조합이라는 말에 아주머니가 보온하다 말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았다. 애초 이 현장은 공기가 얼마 남지 않아 노조티 내지 않고 조용히 일만 하다 빠지기로 한 곳이었다. 우리 직종은 목수 철근처럼 노조가 일상화되지 않은 터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덕트공 중에 가입 인원이 극소수라 현장에서 존재감이 떨어진다. 현장에서 하나의 직종을 조직한다는 말은 에베레스트산을 반소매 반바지 입고 무산소로 등정하는 일과 같다." (p. 92)
★최경주/ 1997년 <전태일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산문집 『닥트공 최 씨 이야기』『닥트공, 노동의 풍경』, 장편소설『사막의 모래바람』
* 안종수_「우리 학교 박 선생」中
박 선생은 학부모나 학생의 동의도 받지 않고, 강제로 남겨 보충수업을 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기초학력을 보강해 준다고 해도, 그게 학생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기초학력은 조금 오를지 몰라도 부진아로 낙인찍혀 나머지 공부를 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가 더 크지 않을까.
어느 집단 어느 사회든 정상분포 곡선이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혓바닥 모양의 그래프를 말한다. 혀끝 쪽과 혀 양쪽 아래 2%의 군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2%의 영재와 둔재가 일상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곡선을 정상분포 곡선이라고 한다. 2%의 학습 부진아를 구제해서 영재를 만들 수는 없다. (p. 120)
★안종수/ 2004년 계간 『작가들』로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결국 로맨스 빠빠를 못 봤다』
* 홍인기_「돌아갈 수 없는 땅 」中
박명규가 철제 의자를 끌어다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너 알지? 너희 집 가는 데 있는 저수지 둑방 말야."
나는 눈빛으로 긍정했다. 명규는 깊은 한숨을 바닥에 뱉어냈다.
"그 자식이 거기서 뒈졌어. 자살이야. 쐬주에 농약을 타 먹었다나 ······." (p. 149)
코를 틀어쥐고 내 옆을 지키고 있던 광우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다시 화톳불 근처에 이르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세웠다.
"봉구 쟤, 명규 마누라한테 당했어. 그 샌님 명규가 바람이 들어 원주, 여주, 서울로 싸돌아다니니까 열 받아서 지두 바람 핀다구 봉구를 고른 거야. 나, 원."
(···)
둑방 아래쪽에서 울음소리가 올라왔다. 봉구의 노모가 동네 아낙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오르며 컥컥 목 받쳐 울었다. 울음소리가 밤의 산 계곡으로 뭉턱뭉턱 끊어져 흩어졌다. 저수지 고인 물 위에 별이 하나둘 떨어져 박히고 있다. (p. 153)
★홍인기/ 1999년 『작가들』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숲의 기억』
* 양수덕_「관에 눕다 」中
"사람은 꿈이 있어야 해."
"꿈이요?"
"그래, 이 할애비는 꿈을 잃었구나."
"할아버지 꿈은 뭐였어요?"
"음음. 뭐냐 하면, 사나이 대장부가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는 거였지만 이젠 다 틀렸어. 너만은 늘 꿈을 간직하고 살아라."
"어떻게요?"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 그게 네 길이고 네 꿈이지." (p. 169)
살아오면서 자신을 둘러싼 풍경이 관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말로 그런 관 안에서 죽은 이처럼 살아온 것이다. 어디를 가든 관은 끈질기에 따라다녔고 꿈이 없는 컴컴한 관 안에서 잘 살기는 어려웠다. (p. 170)
★양수덕/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단편소설집『그림쟁이 ㅂㅎ』『눈 숲으로의 초대』
* 김연식_「비둘기뉴스 특보 」中
문제는 새우 과자입니다. 그간 월미도 갈매기 떼는 관광객이 던져주는 새우 과자에 의존하며 살아왔습니다. 고열량 식사에 중독된 갈매기는 관광객이 사라지자 금단 증상을 호소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별 일없이 인근 월미산 월미산 비둘기 떼를 공격하는 일도 여러 차례 발생했습니다. 알다시피 갈매기는 어른 비둘기를 한입에 꿀꺽 삼키는 포식자입니다. 심지어 토끼도 잡아먹습니다. 갈매기들이 과자 같은 인간들의 먹이를 찾아 내륙으로 진출하며 비둘기와 서식지 갈등을 벌일 수 있다는 우려가 신빙성을 얻는 부분입니다. (p. 177)
그렇게 한바탕. 성실하고 인심 좋은 노인의 적선은 피의 향연이 되어버렸다. 광장에 남은 건, 코와 귀에서 피 흘리고 쓰러진 노인과 동족의 부리에 구석구석까지 쪼여 사망한 수십 마리 비둘기, 너덜너덜해진 날개를 파르르 떨며 자리를 뜨려는 비둘기 몇, 그리고 황량한 광장에 사방으로 나부끼는 깃털뿐이었다. (p. 192)
★김연식/ 2012년 제48회 『신동아』 논픽션, 단행본『스물아홉, 용기가 필요한 나이』, 수필 『지구를 항해하는 초록배에 탑니다』
* 오시은_「엘리시안 」中
나는 준이 들려주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환청처럼. 그리고 준의 말을 이해하는 대신 화가 났다. 준은 죽지 않을 수 있다. 그 기회는 여전히 유효했다. 타워에서 불멸칩을 이식받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고, 병도 고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준은 불멸이 아닌 필멸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 결정이 숭고하고 가치 있고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준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p. 211)
날이 밝고 준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병이 든 엘리시안(※필멸자는 자신들을 엘리시안이라 불렀다. p.199-8행)은 고통 없이 죽기 위해 죽는 날을 선택할 수 있었다. 준이 선택한 날이 오늘이었다.
준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서서 미소를 지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준의 부탁을 터올리며 울음을 참았다.
"네가 웃어주면 좋겠어.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싶거든."
나는 준을 향해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울음을 참느라 볼이 멋대로 씰룩거렸다. 준은 그렇게 죽었다. 어색한 미소로 엉망이 된 내 앞에서. (p. 212)
★오시은/ 2003년 제1회 '푸른문학상' & '새로운 작가상' 수상으로 등단, 저서『천삼이의 환생 작전』『우리 집 화장실에 고양이가 살아요』『안녕, 나의 우주』『고리의 비밀』『내가 너에게』『귀신 새 우는 밤』『훈이 석이』『예쁘기보다 멋지게』『에밀레 너, 딱 걸렸어』『동수야, 어디 가니?』등
* 이상실_「시인과 소녀」中
자동차 회사 근무 경력을 빼고 중소기업 한 곳에 이력서를 넣자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갔다. 사전에 정보를 획득했는지, 아니면 경력을 좀 더 살피려는 의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규가 근무했던 그 자동차 회사 출신인지 물었다. 동규는 숨기지 않았다. 파업 가담여부는 묻지 않았지만 그 회사 출신 노동자는 강성이어서 채용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했다. 이후 이력서를 쓰지 않았다. 인력시장을 기웃거리다 아파트 건설현장에 팔렸다. 질통을 짊어졌다. 방통을 쳤다.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했다. 전선도 끌고 다녔다. 종일 골재를 운반하기도 했다. 손이 떨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새참 때 라면국물이라도 후루룩 들이켜면 근력이 좀 붙었다. 일을 마친 후 소개료와 장갑, 라면과 카스테라, 우윳값을 빼고 남은 돈을 손에 쥐고 버스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동료 인부 송 씨를 만났다. 말이 잘 통했다. 그는 시인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시인이 기거하는 '하우스 휴'에 갔다. 시인과 함께 하우스 휴 자료실에 들어가 벽에 걸린 사진과 책장에 꽂힌 책을 보았다. 밥을 먹었다. 잠도 잤다. 시인이 쓴 시를 읽었고, 그의 시 세계를 들었다. 서로는 노동과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을 이야기했다. 하우스 휴에 종종 들러 시인과 함께 꿀잠을 잤다. (p. 220-221)
★이상실/ 2005년 『문학과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월운리 사람들』『콜트스트링의 겨울』, 장편소설『미행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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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_인천작가회의 신작소설선집 『별들이 네 얘기를 속삭여』에서/ 2023. 11. 10. <애드밸> 펴냄
* 이재은. 김경은. 황경란. 최경주. 안종수. 홍인기. 양수덕. 김연식. 오시은. 이상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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