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생태학에 대한 문답(부분)
박동억
1. 결론을 상정하지 않은 생태주의
1991년 9월 26일 미국 애리조나주의 투손 사막에서 바이오스피어(Biosphere 2)라고 불리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인류가 다른 행성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외부 환경과 완전히 차단된 독립된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지구가 곧 첫 번째로 성공한 바이오스피어라면 그들의 실험이 두 번째로 독립한 바이오스피어를 창조해 내리라는 기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이 100미터 운동장 남짓한 규모의 밀폐 공간을 구축한 이후 150여 종의 동식물을 다섯 개의 구역(사막, 대양, 열대우림, 사바나, 습지)으로 나누어 살아가게 했다. 이 생명체들과 함께 남녀 넷씩 총 여덟 명의 사람이 거주할 것이었다. (p. 319 ~ ~ ~)
결론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2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모든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대원들이 투입된 지 나흘 만에 이산화탄소 수치가 급격히 높아졌고 풀들이 썩어 갔다. 열흘째 되던 날 몇몇 대원은 환각통에 시달렸고, 훗날 이 모든 체험을 대중에게 발표할 대원 제인 포인터는 벼를 탈곡하다가 중지 끝마디가 잘려 나갔다. 그녀는 외부에서 수술을 받은 후 여섯 시간 만에 바이오스피어로 돌아왔다. 이 주쯤 지나자 대원들은 문명인의 사교 방식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주 다퉜고 음식에 집착했다. 그러한 생활을 일 년 이상 지속하자 대원들은 몰래 외부에서 술 한 잔이나 초콜릿 사탕을 반입하기도 했다. 2년 만에 종결된 이 실험은 대원들에게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를 남겼다. 제인 포인터는 종종 운전을 하다가도 눈물을 쏟곤 했다.1)
바이오스피어 2의 실패는 '지속 가능하고 조화로운 생태계'를 실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수많은 계산과 준비에도 불구하고 폐쇄된 공간에서의 생활은 사람에게 극심한 고통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이 실험은 어떤 도구를 발명해 내는 과정처럼, 이러한 시도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인간이 이상적 자연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산출해 냈다. 심지어 학자들에게 바이오스피어 2는 자연을 이해하는 적절한 비유로 이해된다. 생태학자 토니 버지스는 "바이오스피어 2는 합성 생태계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캘리포니아도 마찬가지이죠."라고 말한다.2)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에게 현대적 자연이란 인간이 '합성해 나가는' 도구와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와 달리 그렉 개러드는 주저 『생태비평』에서 바이오스피어 2가 외부 개입이 없었다면 참여자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위험한 시도였으며, 어떤 가치 있는 과학적 결론도 얻지 못한 실험이었다고 혹평한다. 토니 버지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것을 "생태적 시뮬라크르의 좋은 예"3), 즉 인간이 만들어 낸 가상의 자연이라고 언급하는데 그 논조는 비판적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바이오스피어 2가 실패인 이유는 '평형상태'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목적론적 자연 관념, 즉 조화로운 자연이라는 목적지를 상정했기 때문이라는 그의 지적이다.
그렉 개러드는 자연을 개발 대상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관념('자연은 자원의 보고')만큼이나 자연을 미화하는 인문학적 관념을 비판한다. 요컨대 자연을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으로 여기거나 생명을 포용하는 '어머니'로 간주하는 가이아 이론을 그는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이아 이론 또한 자본주의만큼이나 자연에 인간적 관념을 투영하는 메커니즘, 즉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이오스피어 2는 자본주의적인 동시에 인문학적인 생태적 시뮬라크르의 전형이다. 쉽게 말해 '자연은 아름답다' '자연은 조화롭다'라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기보다 인간의 머릿속에서 상상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그렉 개러드는 자연의 우연성과 비결정성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던 생태학'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 포스트모던 생태학은 결론을 상정하지 않는 생태학이다. 그것은 자연이 무엇인지 미리 결론 내리지 않는 접근법이다. 포스트모던 예술이 상상하게 하는 발랄함과 무책임성의 감각과는 달리 포스트모던 윤리는 정반대로 우리에게 실현 불가능한 의무를 암시한다. 그것은 낯선 생명들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가 될지 미리 계획하지 않는 생태학, 어떤 의미로 고통을 감수하는 생태학을 암시한다. 우리'와 '저들'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원리라면, 포스트모던 생태학은 '우리'라는 공동의 지평을 해체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모든 것이 타자다. 인간에게 인간 또한 말이다.
우리가 신중하게 행해야 할 것은 동시대에 부각되고 있는 타자의 생태학과 비인간중심주의를 분별하는 작업이다. 진정으로 비인간 중심적인 생태학은 무엇인가. 그렉 개러드에 따르면 그 기준은 어떤 글이 인간이 아닌 동식물을 비롯한 비인간을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핵심은 공통의 목적을 상정하고 있느냐 아니냐다. 그렉 개러드에게 바이어스피어 2는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모던한 생태학' 즉 목적을 상정하는 생태주의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조화'를 목적지로 삼은 생태학은 바이오스피어 2처럼 폐쇄된 돔을 상정하는 셈이며, 그 폐쇄성 자체가 실은 인간 중심적 사유로의 귀결과 다름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주창되는 타자들의 생태학 대다수는 과거의 인간 중심적인 생태학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많은 생태적 논변이 과거처럼 모든 타자의 공존 번영을 목적지로 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민주정의 형태를 자연에 이식하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한 예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라는 돔을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비인간 타자를 포용하는 범주로 확장하자는 구호이기도 하다. 예컨대 저명한 생태사상가 에두아르드 콘은 인간 중심성을 버리고 모든 동식물의 입장에서 사유하는 태도를 제안한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러한 입장 바꾸기가 인간에게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회'라는 목적지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입장 바꾸기의 능력이 가장 탁월한 존재가 인간인 한 그 안에서 가장 특권화되는 것은 인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따라서 그렉 개러드의 사상에서 천착해야 할 논점은, '우리'의 범주를 넓히거나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실패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없다고 말해 보아야 한다. 오직 타자뿐이다. 이러한 접근법에서 자연은 사르트르의 『구토』에 묘사된 '도시를 포위하고 진군하는 식물'처럼 인간에게 실존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에 가까워진다. 자연이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두려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를 살해할지도 모르는 영문 모를 타자이다. 그러한 타자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포스트모던한 생태학의 윤리는 이렇듯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할 때 시작한다. (p. 319-323)
···下略···이 부분은 책에서 일독 要(참고: 전체 페이지. p. 31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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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파란』 2023-가을(30)호 <quarterly revieu> 에서
* 박동억/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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