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것이란 문학과 예술의 가장 순도 높은 정점을 표상하는 말
이찬
"신성한 잉여"는 1938년 4월 발표된 임화의 『작가와 문학과 잉여의 세계』에서 처음 등장한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적 격차를 지닌 이 말을 비평집의 제목으로 사게 된 까닭은 1935년 8월 카프 해체 이후 한 치열한 비평적 영혼이 내딛어간 사유의 진통과 고뇌, 그리고 '다른 미래'를 향한 역사의 잠재력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진보주의자의 필사적인 모색이 휘감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저 영혼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을 무수한 후속 세대들의 감응 순간을 소리 없이 응집하고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비평은 창작과 더불어 한 가지로 가치 있는 창조적 예술이며, 작품의 단순한 판단자가 아닌 산 증거다."라는 문장에서 이 책은 움텄을뿐더러, '숭고'에 가까운 '비극적 환희'와 더불어 어떤 가슴 벅찬 미래를 예감했기 때문이다. (p. 5/ '책머리에' 中)
우리는 왕가위의 영화 <동사서독; 리덕스>의 "홍칠"이란 인물을 김수영 시 「긍지의 날」과 겹쳐 읽으면서, 그를 "긍지"의 주체이자 니체의 운명애의 주인공으로 새롭게 호명했다. 또한 『주역』의 일부를 구성하는 산택손 괘와 풍뢰익 괘에 대한 정이천 주석의 "순환"의 의미를 살피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사상사적 맥락 전반을 가로지르는 극력極力의 역동적 상호 작용, 곧 역동적 평형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활용하여 김수영과 왕가위가 구체적 시공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상호 접맥될 수밖에 없는 예술적 궤적들을 자유로운 크로스오버의 차원에서 조명하려 했다. (p. 100-101)
어쩌면 이와 같은 이중성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이면적 진의眞義와 더불어 봉준호의 철학적 사유와 세계관의 심부를 꿰뚫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건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봉준호 장르" 또는 "삑사리의 미학"으로 널리 알려진 봉준호의 혼종성의 장르 창안이나 우발성의 세계관(미학)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저 모순적인 이중성이야말로, 붕준호의 모든 텍스트가 서로 다른 여러 장르와 미학들이 제각각 구축하고 있는 그 완고한 경계를 해체하는 과감한 크로스오버의 시도와 혼종성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창안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집약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옥자>가 생태주의 윤리의 당위성이라는 주제의식을 명시적인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서사 전개나 단순한 윤리의식의 표명에 머무르지 않고, 그 내부에서 미학적 긴장과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수미일관하게 부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미시적인 차원에서 조형된 다양한 이원 대립 구도의 복합적 배치, 곧 모순적인 이중성의 섬세한 짜임관계(Konstellation)에서 유래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p. 134-135)
"봉준호 장르", "삑사리의 미학", "봉테일" 등으로 표상될 수 있을 봉준호 영화의 혼종성과 크로스오버의 특질, 나아가 무수한 모순과 아이러니를 순식간에 하나의 돌발사태처럼 제시하는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법은 이처럼 단 하나의 전일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도리어 『주역』 담론과 생태주의 담론의 창조적 융합 과정을 통해, 또는 한국과 동아시아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평가되어 온 "감응"과 "감통"을 데리다의 '원초적 에크리튀르' 개념과 대비하고 융합하려는 시도 등을 통해 적실하게 해면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p. 150-151)
"정신은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일도 기억한다." (略) "기억"은 단지 "과거"를 향한 것만이 아니라, "미래"로 열린 것이 된다. (황현산, 「만해의 이별」『우물에서 하늘 보기』 168쪽 / (p. 180 (略)181)
"시적인 것이란 문학과 예술의 가장 순도 높은 정점을 표상하는 말일 것이며, "극단적인 것"이란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한 동경" 또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이상"을 가리키는 어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저 동경과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문학과 예술의 존재론적 위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p. 184)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황현산, 「창조와 희생」 『우물에서 하늘 보기』) 131쪽 / (p. 185)
"만일 그것이 의식된다면 작가에 의하여 부정될지도 모르는 새 세계를 작품으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의 독립적 가치를 승인하고 나아가 그 존재와 성장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을 것이다'라고 비평의 존재 가치를 정의하는 대목은 바디우가 말하는 '충실성'에 해당할 것이다. 나아가 "비평가는 그러므로 직접적으로는 작가와 대립하나, 그 작품이 생산된 지반인 현실과 밀착하고 잉여의 세계를 작가의 의도보다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승인하는 기준을 또한 그 현실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라고 진술한 부분은 '탐색'에 대응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잉여"로 집약되는 1930년대 후반 임화의 비평적 모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창조적 핵심은, 이른바 탈근대적인 사유와 담론을 선취하고 있는 이론적 선도성의 차원에서 추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의미심장한 문제는 그것이 이후 한국문학사에 펼쳐진 무수한 이슈와 논쟁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지적 통찰과 역사적 혜안을 담고 있다는 데서 온다. 아니, 그 스펙트럼 전체를 폭넓게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탁월한 선례를 이룬다는 데 있을 것이다. (p. 205-206)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김수영, 「생활현실과 시」 264쪽) /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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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 문화비평집 『신성한 잉여』에서/ 2022. 9. 29. <작가> 펴냄
* 이찬李燦/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한국 현대시론의 담론과 계보학』,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 영화와 시와 비평이 더불어 감응할 수 있는 크로스오버 공간을 모색하고 있으며,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 이미지의 횡단과 융합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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