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와 그로테스크(부분)
시학적 현대성의 양화와 음화
최진석/ 문학평론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시학, 더 넓게는 문예학적 범주는 대부분 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고 연구하고 비평하고자 할 때 가장 근본으로 사삼 텍스트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B.C. 335)이지, 그보다 8세기나 더 늦게 나타난 『문심조룡』(文心雕龍) 같은 동아시아의 저술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전자가 더 큰 위상을 갖게 된 이유는 19세기 말 동아시아 전체가 서구를 모방하여 근대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때 받아들인 서구 근대문학의 출발점은 고전고대가 아니라 17~18세기의 신고전주의에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 근대적 출발점에서 재인용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모방의 대상은 결국 서구 근대 전체였고, 문예학의 모방적 전거 역시 서구 근대였기에 이 같은 평행적 복제현상이 우리의 현재를 구성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서구의 문예이론과 비평이 거의 동시적으로 유입되고 연구 및 적용되는 현대 시학이론에서 숭고가 더 이상 한국어 화자의 일상적 의미론에 기대지 않은 채 서구 지성사적 맥락에서 재의 미화되고 있음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칸트는 근대 예술이론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이자, 숭고미의 개념적 정초자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그는 숭고(the Sublime)와 미(the Beautiful)를 분리시켜서 전혀 상반되는 기준 속에 배치했는데, 『판단력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은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책이다. 이 자리에서 칸트의 철학을 상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범박하게 말해 그의 미학과 숭고론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우선 미학 즉 취미 판단은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를 말한다. 즉 우리의 감성이 대상과 마주쳤을 때, 그로부터 지성의 형식과 부합하는 합목적성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면 이를 미적 쾌감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과일의 일반적 정의를 알고 있는 아이가 수박이나 포도, 바나나 등의 다양한 형태와 크기, 색상을 갖는 사물들을 보고 그것들이 과일의 범주에 있음을 깨달을 때 얻는 쾌감이 미학적 판단의 근거를 이룬다. 과일에 대한 개념을 갖는다면, 그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상 마주친다 해도 과일이라 부를 수 있다.
반면, 숭고의 판단은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를 다룬다. 숭고의 대상은 지성의 형식을 초과하거나 몰각한다는 점에서 인식의 쾌감과 다르다. 가령 물에 대한 관념을 아무리 잘 알아도 바다를 처음 본다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거대한 크기와 위력, 무한에 가까운 푸른 파도의 규모는 통념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으로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서 목도하는 고산준령의 자태는 경이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멋진 풍경을 뜻하는 '절경'이란 단어는 고산준령의 모양새가 눈에 익고, 다소간 평범해진 연후에야 적용되는 언어적 해석일 뿐, 최초의 마주침과 그 감응을 담아낼 수는 없다. 숭고는 상상력이 맞닥뜨린 감각적 충격, 그 놀라움의 지각을 지성 너머의 이성으로 간신히 포착할 때 비롯되는 마음의 상태라 할 만하다. (p. 26-27)
-----------------------
* 『시로여는세상』 2021-겨울(80)호 <특집 1/ 현대시와 숭고 > 에서
* 최진석/ 문학평론가, 2015년『문학동네』로 등단, 저서『불가능성의 인문학: 휴머니즘 이후의 문화와 정치』『감응의 정치학: 코뮨주의와 혁명』『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
'한 줄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문예지의 어제와 오늘(전문)/ 이승하 (0) | 2023.05.02 |
---|---|
시간은 두 개의 흐름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김지영 (0) | 2023.04.30 |
시적인 것이란 문학과 예술의 가장 순도 높은···/ 이찬 (0) | 2023.04.25 |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중요성/ 이경교 (0) | 2023.04.20 |
예로부터 시인은 가난하게 산다고 했습니다/ 이향아 (0) | 202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