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중요성/ 이경교

검지 정숙자 2023. 4. 20. 03:08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중요성

      - 시창작강의 『푸르른 정원』 中

 

    이경교

 

 

  예로부터 위대한 학문이나 예술의 배후엔 반드시 그만한 인격과 정신이 요구되었으니,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의 중요성이 유독 강조되었던 것도 그 본보기에 해당한다. 위대한 학문이나 예술은 완성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기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계관의 확립과 인간성의 완성을 우선했던 것이다. (p. 33)

 

  보들레르(Baudelaire)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라고 말할 때, 그 고귀함의 본질은 현실을 제어하고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일컫는다. 상상력은 일상의 굴레에 갇히지도 않거니와 현실의 법칙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상상력이야말로 새로운 감각을 향해 열린 문이며, 새로운 세계로 띄우는 초대장이다. (p. 85)

 

  하나의 오브제가 연상이나 유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본래의 성질을 잃고 변형된다는 사실은 연금술이 지향했던 반복적 제련을 통한 정제와 순환의 과정과도 흡사하다. 영혼은 동적인 변화를 통하여 완성에 이른다는 연금술의 정신과 시 창작 과정에서 상상력의 역할은 여러 면에서 비견된다. (p. 105)

 

  근대성의 출발은 전근대성이 지배하던 원자론적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원자론적 세계란 입자의 현재 상태를 통하여 입자의 미래를 예측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론적 결정론은 20세기 초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이 등장하면서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입자의 현재상태에 대한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자각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논리, 그리고 현대의 카오스 이론 등이 있다. 시간과 공간이 모두 인간의식의 한 형태라거나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시간적 간격 자체가 부재한다는 자각은 아주 오래된 불교적 사유방식을 닮았다. (p. 116)

 

  프로이트는 과학의 역사를 소외의 역사로  보았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행성계의 중심이 아님을 밝혔고, 다윈은 우리 인간이 동물 중의 하나란 사실을 밝혔으며, 프로이트 자신은 인간의 합리적  행동이 무의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밝혔다. 이렇게 볼 때, 소외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타자를 지향해 나가는 성숙성의 관문이며, 창조성의 비밀이란 주장은 설득력을 얻는다. (p. 196)

 

  영웅담(Hero-story)의 기본구조를 밝혔던, 블라디미르 프로프(V. propp)에 따르면, 영웅은 반드시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무당이 영혼의 찢김을 통해 거듭난 사람이듯이, 예술가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프로이트의 입을 빌면, 이것이 보상심리다. (p. 196-下)

 

  여기서 문제는 어떤 자연인가 그것이 문제다. 자연이 더 이상 음풍농월의 잔재로 머무는 낭만주의 방식으로는 안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인공적인 자연은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 시인에게 선택된 자연대상은 사실 시대인식의 반영이며, 시인의 세계관이 투사된 현장이다. (p. 206)

 

   공자가 『시경』을 선집한 것은 BC 6~5세기경이었으며, 그 시기는 바로 부처가 법을 설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호머(Homeros)가 『ILIas』와 『Odysseia』를 집대성한 것은 BC 5~4세기경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시학』을 저술한 것은 BC 4세기 경이었다. 이렇게 볼 때, 편중된 어느 시기의 위인들에 의해 문학과  철학은 뼈와 살을 갖추었고, 건강한 피를 공급받았다고 할 수 있다. (p. 229)

 

  동양에서 경서의 본질적 요소 중 하나가 '사실이 신실해서 허위가 없는 것, 정이 깊어서 거짓이 없는 것'*이며, 아놀드가 말한 좋은 시의 주제는 '시의 언어와 문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동서의 시각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시는 뜻을 서술한 것이고, 노래는 말을 읊은 것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기 때문이다. 기원전 2000년에 이미 문자를 만들었던 뮈케나이, 그리이스어의 문서에서 볼 수 있는 뮈케나이 사회는 역사 시대의 그리이스 사회와는 아주 다른 동양적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기 전의 희랍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2세기로부터 7세기경까지의 로마 문화를 낳게 하였고, 그 후의 유럽 문화는 기실 7세기로부터 12세기까지의 아랍 문화에 자극 받은 바 크다거나, 프랑스 상징주의가 포우(E. A. Poe)의 시와 시론으로부터 시작됐고,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와 T. S 엘리어트는 부분적으로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입었으며, 특히 한시를 영역한 에즈라 파운드 등은 동양시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견해들을 주목해 볼 때, 상이한 문화적 전통과 관계없이 문화란 상호연관의 물길을 주고받으며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서구문학과 다른 각도에서 동양문학의 존재를 엄연히 인정하면서도, 동양문학의 이론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동서는 정서가 다르고, 문학관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오늘의 한국문학에 대한 이해는 서구문학 이론으로 무장되고, 서구인의 척도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한국문학의 토양이 무속신앙에 그 뿌리를 뻗고, 불교와 유교, 그리고 노장사상의 줄기와 가지 위에서 꽃 피웠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서구의 문예 이론이 우리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적합할 수만은 없다.

  동양문학은 서구문학이 지닌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인 이론적 틀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동양문학 이론의 존재 여부를 유명무실하게 했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BC 3세기경의 분서갱유 사건도 동양문학 이론의 발전적 흐름을 끊어버린 원인이 되었으며, 이보다 중요한 원인은 서양과 대별되는 문학관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역경易經』에서 말하듯 '사물을 판별하여 바르게 표현하는 것'이었고 '성현의 저술을 문장이라 총칭****한 만큼 읽고 배우는 것, 혹은 관조하고 즐기는 것일 뿐, 내용의 시비를 가려내거나 평가하는 대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여건 아래서, 동양문학 이론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책이 문심조룡文心雕龍』이다. (p. 230-231)

  

   * 유협. 문심조룡文心雕龍, 최신호 역, 현암사. 1990. p 17.

   ** N. 프라이. 비평의 해부, 임철규 역, 한길사. 1989. p 37.

   *** 이영걸. 영미시와 한국시, 문학예술사. 1981. p 24.

   **** 문심조룡. p 131.

 

  중세예술의  한 특징은 예술이 수도원과 대성당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음악의 경우 기존 성가 외에 다성성가多聲聖歌 음악이 만들어졌으며, 그림의 경우 성화가 예술의 전면으로 부각된 것도 이 시기였다. 교권이 능히 왕권 위에 군림하였던 이 시기, 예술은 종교적 찬양과 그 지도 아래 배태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종교시가 쓰여지고, 성직자와 더불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기사계급과 영주계급이 등장하는데, 기사문학이라 할 수 있는 뚜르바두르(Troubadour, 음유시인)는 이 무렵에 등장하였던 양식이다. 인간 개인의 의미가 축소될수록 정치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이 강화되어, 개인의 의미를 말살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중세라고 하는 거울을 통하여 관찰하게 된다. (p. 257)

 

  예술과 종교가 등가적 의미로 자리매김되었던 중세와 비견되는 점이 북한 현대시에서 찾아진다면, 그것은 예술과 이념이 공식적으로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며, 신에 대한 찬양이 중세의 몫이라면, 김일성 부자에 대한 찬사와 존경이 오늘날 북한 현대시의 핵심 모티브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종자론과 인간학이 요구하는 사상적 배후엔 리얼리즘으로 위장된 결정론에 대한 맹신, 사회주의 체제가 지닌 질서의식에 대한 확실성만이 남겨진다. (p.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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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교_시창작강의 『푸르른 정원』에서/ 2012. 2. 20. <미래교육 기획> 펴냄

  * 이경교/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이응 평전』『꽃이 피는 이유』『달의 뼈』『수상하다, 모퉁이』『모래의 시』, 저서『한국현대시 정신사』『북한 문학강의』『즐거운 식사』수상록『향기로운 결림』『화가와 시인』『낯선 느낌들』, 역서『은주발에 담은 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