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특강>에서
시와 난해성의 문제(앞부분)
이상의 『오감도』를 중심으로
권영민/ 문학평론가
1.
현대시의 난해성 문제를 비평적 담론의 주제로 처음 제기한 것은 시인이자 비평가인 김기림이다. 김기림은 「현대시의 발전」(조선일보, 1934. 7. 12-22)을 통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새로운 시는 알 수 없다고들 말한다. 가령 정지용 · 장서언 · 조벽암 · 이상의 시는알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나의 시에 대하여도 물론 알 수 없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여러 사람의 입으로부터 혹은 글에서 듣고 보았다. '왜 남이 보고 모르는 시를 쓰느냐' 이 말은 문장 그것만으로는 한 개의 공격의 포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작자 이외에 한 사람도 알아볼 수 없는 시를 쓴 시인을 나는 본 일이 없다. 다만 그 시를 알아보는 사람이 대다수냐, 그렇지 않으면 극히 소수이냐 하는 산술 상의 문제뿐이다. 또한 대다수 사람이 얼른 보고는 알 수 있는 쉬운 시만 쓴 큰 시인을 나는 모른다. 동양 시인들의 예를 볼지라도 이백李白이나 두자미杜子美나 고운孤雲이 촌부자가 얼른 보고 알아보는 시만을 쓰지는 않았다.
시를 이해하려면 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더 평범한 말로 하면 어느 정도의 시에 대한 교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 없이 다만 새로운 시를 모르겠다고 하고 비난 공격하는 것은 산을 내게로 걸어오라고 호령한 마호메트의 만용과 같은 일인가 한다. 정치나 경제에 관한 논문을 읽는 데도 어느 정도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전연 준비 없이 새로운 시를 읽는 것은 대개는 소득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의 난해의 책임은 반드시 독자의 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상당한 시에 관한 교양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난해할 지경으로 그것은 난해한 것도 사실이다. 그 원인은 단순하다. 우리가 '새로운 시'라는 개념으로 볼 때, 시 이전의 낡은 시는 시론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 그루의 아름다운 단풍나무 혹은 한 줄기의 맑은 시냇물처럼 누구의 앞에나 던져져서 감상을 받는다. 그러나 한 개의 정신 활동으로서의 새로운 시에는 그 정신 활동의 시론이 있다. 그 방법론의 인도 없이는 그 시의 속에까지 들어가기 어렵다.
나는 언젠가 시론의 유무가 곧 낡은 시인과 새로운 시의 구별을 짓는 것이라는 의미의 말을 한 일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는 낡은 시가 감상의 대상으로서 제공되는 것과는 딴판으로 이해의 대상으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낡은 시보다는 훨씬 지적 대상임에 틀림없다.
김기림은 시의 난해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시에 관한 교양을 먼저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독자의 준비 영역에 속한다. 시의 난해성은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가 가능하다. 여기서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내재적인 요인이다. 이것은 현대시의 숙명과 같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현대시에서 시적 개성과 시적 독창성의 영역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시는 곧 개성의 표현이고 독창성을 생명으로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편적 감성과 개성의 객관적 방향에 대한 요구는 분명 개성적 표현과는 상치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시적 난해성의 외재적인 문제는 시인의 영역이 아니라 독자의 영역에 속한다. 현대시는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치 체계로서의 현대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 모든 전위적인 작품은 그것이 이끌고 있는 역사적 흐름의 특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김기림의 지적대로 시를 이해하는 데에 일정한 교양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p. 118-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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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半年刊誌 『한국시인』 2023-봄/여름(4)호 <지상특강>에서
* 권영민/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우리 시 깊이 읽기』『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분석과 해석』외 다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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