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기 라디오 PD이던 1960년대 끝 무렵에는
유혜자/ 수필가
내가 초기 라디오 PD이던 1960년대 끝 무렵에는 5분, 10분 정도로 상식이나 교양에 도움 주는 짧은 프로그램이 많았다.
나는 M선배가 맡았던 「사색의 벤치」 녹음 스튜디오에서 자주 견학했다. 그때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당시 C일보 논설위원)이 오셔서 며칠 분을 녹음했는데, 최고 인기스타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1963년도에 나온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너무 감탄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p. 144)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57세)은 1802년 귓병 치료차 하일리겐슈타트에 가서 살다가 기대했던 청력 회복이 가망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죽을 결심을 했다. 동생들에게 이른바 하릴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던 곳인데 그의 동상에서는 고뇌와 갈등보다 안정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머리 위의 제비는 우리 일행이 가까이 가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에 나오는 제비와 왕자의 동상에서 그 동상의 눈동자는 파란 사파이어이고 몸체는 순금인데 베토벤 동상은 수수한 돌이었으나 당당해 보여서 좋았다. 오스카 와일드는 미국을 방문하여 이민국을 통과하면서 신고한 물건이 있느냐는 세관원의 물음에 "신고할 것이라곤 나의 천재성밖에 없다."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났었다. 그토록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던 오스카 와일드처럼 독일 본 태생의 베토벤이 빈으로 입성할 때도 자신에 차 있었다.
하이든에게 작곡을 배우던 베토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문화예술의 중심지 빈으로 유학 간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그는 성격이 온화한 하이든이 귀족들에게 저자세로 처신하는 것이 못마땅했고 작곡 견해도 자신과는 다르자 고향을 떠날 결심을 굳혔다. 그는 자신의 음악 실력으로 빈 귀족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자신하며 유학을 떠난 것이다. (p. 211-212)
제정 러시아 말기 음울한 시기에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82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차이콥스키(Pyotr Llych Tchaikovsky 1840-1893, 53세). 톨스토이의 문학과 차이콥스키의 음악, 러시아의 영혼 두 거장의 심오함은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톨스토이를 몹시 존경했다는 차이콥스키도 '톨스토이가 안 계시면 저 접시 위에 메모지를 놓고 갔겠구나.' 생각하면서 톨스토이 기념관을 나왔었다.
1876년 어느 날 톨스토이는 차이콥스키가 교수로 있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마련한 연주회에 참석했다. 차이콥스키 옆자리에 앉아서 차이콥스키 작곡의 현악4중주 1번의 2악장을 듣고 있던 톨스토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훗날 톨스토이는 차이콥스키에게 "나는 나의 문학상의 노고에 대해서, 그때의 그 훌륭한 연주보다도 더 아름다운 보답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p. 118-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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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자의 음악 에세이 6 『음악의 페르마타』에서/ 2021. 5. 31. <선우미디어> 펴냄
* 유혜자/ 충남 강경 출생, 1972년『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자유의 금빛날개』『사막의장미』『미완성이 아름다운 것은』『꿈의 위로』등, 음악에세이『음악의 에스프레시보』『음악의 알레그로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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