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사회학을 향하여(부분)
오민석
문제는 형식이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학은 온갖 사조와 형식을 이미 다 거쳐 왔다. 리얼리즘의 시대가 있었다면, 신고전주의 시대도 있었고, 낭만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작가들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세계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습득해왔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온갖 방식의 예술 형식들이 시도되고 있다. 앞에서 욕망의 '사회학'에 대한 탐구를 주장했다고 해서 1970~80년대의 '형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학이, 예술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클리셰cleiche이고 반복이다. 예술은 그런 점에서 과거의 형식과 계속 작별하는 작업이고, 예술 공간에서 현재는 늘 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는 것은 작가들의 '매일'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사회학을 표현하는 방식도 '새로' 탐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학은 개체들의 연결과 연속으로 인류가 존재하며 그 인류가 '공통적인 것'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임을 자각하되, 작가들은 각기 고유한 형식으로 이 '공통적인 것'을 표현해야 한다. 간혹 취향과 당위를 혼동하는 작가나 평론가들이 있다. 가령 시가 난해하면 절대 안 되며, 그런 난해한 시들이 독자들과 공감대를 망친다든가, 표현할 능력의 부재 때문에 시가 난해해지는 것이라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절대' 안 되는 형식이란 없다. 난해한 시를 쓰든, 쉬운 시를 쓰든지 간에 그것은 작가들이 알아서 할 문제이다. 그리고 한때 러시아에서 유행했던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처럼 문학이 정당政黨의 강령이 되서서도 안 된다. 강령은 그 자체 동일성의 반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 모든 낡은 형식들과의 싸움이므로, 문학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새로운' 표현이다. 한마디로 말해 '공통적인 것을 새로이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다양하게 열어놓는 것이야말로 수천 년 동안 다양한 장르와 사조를 거쳐 온 문학사가 할 일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1930년대에 루카치와 브레히트B. Brecht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표현주의 논쟁에서 브레히트가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법들은 낡게 마련이고, 그것들이 갖고 있는 자극의 효과들도 떨어지게 되어 있다.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할 것이고 그에 걸맞은 새로운 기법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현실은 변한다. 따라서 그것을 재현하는 수단 역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현방식에 대해 우리는 관대해야 한다. 너무 진부해서 부언附言을 할 필요가 없는 텍스트야말로 가장 나쁜 텍스트이다. 새로운 표현은 때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새로운 표현이 없이 새로운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새로운 표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관습'이 되고 예술적 작별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미래를 계속해서 앞당기는 자이고, 공통의 문제를 고도의 표현력으로 끊임없이 건드리는 것이다.
사실 먼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이 다루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는 '욕망'과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사회학이다. 그러나 현대문학이 빠질 수 있는 깊은 함정 중의 하나는 자본 기계의 파편화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를 총체적으로 건드리지 못하고 골방에서 자위自慰의 언어를 남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의 사회학까지 가지 못하고 욕망의 탐구에 머물 때, 문학은 '공통적인 것'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문학이 공통적인 것을 건드려야 하는 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갑작스러워 보이는 재난을 겪을 때야 인류는 자신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현 단계 지구 단위 최고의 적은 자본 기계이다. 이 기계와의 싸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물들의 존재 자체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이미 월남전의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코비드 사망자가 나왔다. 효율과 이윤과 경쟁을 최고선으로 아는 세계 최고의 자본 기계가 만든 비극이다. 언제부터인지 경쟁과 착취가 아니라 환대와 사랑의 세계에 대한 철학적 갈망이 넘쳐나고 있다. 데리다J. Derrida의 환대의 철학이나 레비나스E.Levinas의 타자의 철학, 영국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평론가인 테리 이글턴T. Eagleton의 신학적 전회轉回같은 것들은, 결국 문학이 넓은 의미의 윤리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지 오래된 지금, 자본 기계에 맞설 구체적인 대항 시스템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모든 일은 선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에서 문학 행위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그 "선"은 긍극적인 의미에서 타자들에 대한 환대와 사랑이다. 문학은 직접적 메시지가 아니므로 윤리 교과서가 될 필요는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주체의 '안'과 더불어 '바깥'을 사유하되 그것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내는 것은, 모든 예술의 선택이 아닌 운명이다. 욕망의 사회학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건드리되 다양하고도 새로운 형식에 담아내는 어려운 작업이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가야 할 이런 길이 없다면 굳이 문학과 예술을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취미생활의 결과물에 예술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취미는 클리셰를 넘지 못한다. 격렬하고도 깊은 자기 싸움의 끝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작가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모든 반복과 관습과 위계는 예술의 적이다. 우리는 지나온 발자국을 학습하며 새로운 발자국을 남긴다. 미래의 예술가들이 이미 클리셰가 된 우리의 발자국을 들여다보고 다시 자신들의 길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항상 현재가 아니라 도래할 미래이다. 그 미래는 안으로 문을 닫아 걸은 골방이 아니라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접점, 경계 위에서 피어난다. 작가는 그 경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하는 자'이다. (p. 6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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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석 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에서/ 2022. 11. 28. <문학의전당>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창간호 신인상 시 부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경계에서의 글쓰기』『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시와경계 문학상, 시작문학상 수상. 현)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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