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김영범

검지 정숙자 2023. 1. 31. 14:35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불행하게도

    1980년대와 일맥상통하는 시의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김영범

 

 

  문학비평의 기본적인 기능이자 일차적인 목적은 문학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밝히는 일이다. 하지만 문학은 진 속에서 배출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따라서 문학비평의 또 다른 기능과 목적은 작품이 배태된 현실과 그것에 대한 창작자의 시선을 공히 탐침함으로써, 인간 삶의 개별성에 내재하는 보편성을 짚어 내고, 이것을 가능케 한 세계의 특수한 구조를 작자 그리고 독자와 함께 들추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문학의 근황을 살피고, 그 곳에 잠재하고 있는 문학의 미래 나아가 세계에 대한 전망까지 내다보는 것은 비평가들의 공통된 바람이자 의무일 터이다. (p. 7-8)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불행하게도 1980년대와 일맥상통하는 시의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시에서 리얼리즘은 어쩌면 오래 잠복해 있었다. 그리고 1990년대의 논쟁 이후 '시와 정치'에 대한 논의가 문단에서 거론되었을 때, 담론의 중심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지금-여기라는 불모지를 서성이고 있는 '다른 얼굴을 한 리얼리즘'을 우리는 이렇게 여직 마주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얼굴들이 부르는 노래를 흘려들을 수는 없다. 그것들은 '봄'을 기다리는 우리의 열망과 공명하고 있다. 달갑지 않은 얼굴이지만, 정치사회적 '무거움'은 시에게 그런 얼굴을 꾸미도록 몰아세우고 있다. 리얼리즘의 귀환. 이는 우리가 '서울의 봄'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진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시가 아닌 삶으로써 '악무한'을 끝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어느 먼 훗날, 리얼리즘은 다른 얼굴로 다시금 찾아올 것이다. 그것이 시의 의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p. 58-59)

 

  은자불우隱者不遇

  산수화는 줄곧 동북아시아 회화의 주류였지만,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서는 보다 특별한 지위에 오르게 된다. 가령은 조선 초기 이현보의 「어부가」후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상기해 보자. 알다시피 이 작품들은 산수화의 전형적인 이미저리를 응축한 '어부漁父'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어부漁夫가 아닌 이들의 삿갓과 도롱이는 현실과의 노장적 거리를 상징했고, 사와 대부大夫가 이 거리를 누리거나 그런 향유를 와유臥遊하도록 하는 세계 질서의 가운데에는 '임금'이 좌정하고 있었다. 노장의 자연관과 유교의 이념이 결합했으나, 실제로는 후자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경세經世와 제민濟民에 대한 포부를 이들 시가에서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뜻밖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윤선도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 양란을 치르고도 조선이라는 도학 세계道學世界는 오히려 건재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중당中唐 가도賈島가 찾았던 이와 달리 조선에서 은자는 실상 사대부였다. 지배층의 취향이 깃든 문화의 산물이 바로 산수화였던 것이다. 안개 자욱한 산수의 이면은 자연스럽게 은폐되었다. 아니 그 아득함이 향유의 본질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백성들의 불우不遇는 우선 거기에 기인했을 터이다.

  허나 자주는 아니어도 도학 세계에 성군聖君은 출현했고, 산수화도 질적 변모를 계속했다. 그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작품은 아마도 「이인문 필 강산무진도李寅文筆江山無盡圖」일 것이다.하지만 이 그림이 기존의 산수화와 구별되는 점은 사계절의 대자연을 파노라마로 연출한 규모의 광대함에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산수와 어우러진 한 사람의 은자나 그를 어부漁父로 만들어 주는 한 척 거룻배라는 전형을 번복시켰다는 데 있다. 기백幾百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과 배들은 물론 구릉이나 천봉만학 곳곳에 반듯하게 자리한 집들과 그런 거처들을 이어 주는 여러 길들은 이인문(正祖時代,1745-1824, 79세)이 그려 낸 것이 사람살이의 시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따라서 은자가 아닌 백성이며, 자연은 그들 삶의 터전이다. 원경을 부각시키기 위해 쓰인 안개도 새롭다. 원경 역시 그런 무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럴 때 아득한 안개는 세상살이의 간단없음과 인생살이의 꿋꿋함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게 된다. 그러나 요순堯舜의 과거로 회귀하기보다 백성들과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던 성군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만 그가 총애했던 화가의 그림으로만 남았다. 이 그림이 보물이 된 까닭은 우리가 여태 그런 세상을 온전히 마나지 못해서일까. (p. 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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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범 평론집 『증상의 시학』에서/ 2023. 1. 20. <파란> 펴냄  

  * 김영범/ 1975년 경남 밀양 출생, 2013년 『실천문학』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한국 근대시론의 계보와 규준』『신라의 재발견』(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