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세계 - 미술>
밤중에 온 하얀 꽃
김병종/ 화가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1년은 어떤 면에서 그의 전 생애를 견인할 만큼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그가 보낸 지상의 시간 대부분이 문명과 생명, 그리고 시대에 대한 번뜩이는 레토릭으로 일관된 것이었던 데 반해, 마지막 1년은 비언어적 서사를 보인 '몸'의 시간이었다.
시시각각 소멸해가는 육신의 시간 너머로 황홀하게 펼쳐지는 또 다른 생명세계를 응시하면서, 이 언술言述의 귀재는 평생의 무기였던 언어를 놓아버린 대신, 죽음이 곧 생명이며 새로운 탄생이라는 비언어적 알고리즘 하나를 완성하였다. 일찍이 딸 이민아 목사의 죽음을 통해 참척慘慽의 슬픔 너머에서 새로운 생명세계로 이동해 가는 모습을 경외감으로 바라보았던 선생은 이를 자신의 것으로 육화시키고 체현하였다. 그가 한사코 일체의 항암치료나 투약을 피하려 했던 것도 맑은 정신 속에서 끝까지 진화해가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싶었던 까닭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내게 들려준 얘기 한 토막. 세상에서는 내가 딸의 희생을 놓고 신神과 '딜'을 벌인 것으로들 알고 있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가 피할 수 없는 주제로 내게 다가온 것은 전혀 다른 각도와 방향에서였어요. 오래전 연구년으로 일본의 한 소도시에 머물던 시절, 편의점에서 불빛만이 새어나오는 깜깜한 벌판의 교차로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어요. 하늘엔 별이 총총했는데 우주에 홀로 내팽개쳐진 느낌이었고 간절하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었죠. 그때 얼핏 내 앞으로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만진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날 밤의 그 형언할 수 없고 압도적인 느낌을 묻어두고 있었는데, 훗날 환히 웃으며 죽음을 맞아들이는 딸을 보고, 문득 그것은 더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면에서 내 딸은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내 앞에서 등을 밝힌 맑은 선지식 같은 존재였던 셈입니다. 나는 영적靈的 지진아였고.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우리집에 소담하고 하얀 양란을 보내왔다. 만나기로 한 날을 하루 비켜 먼저 떠나게 된 데 대해 양해를 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의 몌별사袂別辭로. 어두운 밤중에 온 희디흰 꽃은 혼백 같았다. 그날 밤, 어둠을 뚫고 온 하얀 양란은 '생은 계속된다'는 메시지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생의 종장에 다다랐을 때 몸은 더할 수 없이 쇠약해져서 뼈만 앙상했지만, 눈빛은 선사禪師처럼 형형했다. 그 눈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빛이나 불안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 데 적이 놀랐다. 오히려 죽음에 대해 올 테면 오라는 듯한 자신감 같은 것이 비쳤다. "나는 가도 그 생명의 '밈meme'은 사방에 퍼져 있을 것입니다. 문자를 가진 자의 행복이지요." 마지막이 가까울 때는 그런 말도 했다.
선생은 길고 오랜 투병 생활 동안 서재를 고수했다. 응접실 겸 서재를 병실처럼 쓰면서 거기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을 떠날 때는 어땠을까. 역시 서재였다. 호위병들처럼 자신을 둘러싼 책들, 특히 백 권을 훌쩍 넘은 평생의 저작들과 둘러선 가족들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이는 평소 내게 말하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병실 침대에서 죽기 싫다고.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평생을 인문과 사회, 문학과 예술의 경계인으로 살며 지식의 최전선에 서 왔던 선생은 이렇게 하여 생의 마지막 주제로 다시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선생은 생전 유독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매달렸고, 나와는 <생명 2인전>을 열어 시와 그림의 접점에서 함께 머문 적도 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마침내 평생의 화두였던 생명에 방점을 찍은 이어령. 언제 다시 그와 같은 이를 만날 수 있을까. 지난 세월 그분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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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서울』 2022-11월(253)호 <예술의 세계/ 미술> 에서
*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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