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배우개 시장, 방산장터거리
박제천
나의 본적지는 '서울 중구 주교동 15번지', 대학생 때까지의 생장지는 '방산동 4의 14'다. 배우개시장 혹은 방산장터거리라 불리던 길이다. 지금은 포장, 수건, 벽지 등의 전문업체 시장이지만, 시장 한복판이 을지로5가에서 종로5가로 이어지는 연결도로에 수용되기 전만 해도 남대문시장과 더불어 서울의 양대 외제 물건 시장이었다. 남쪽의 중부시장, 북쪽의 광장시장, 동쪽의 평화시장과 연결되었으니 유소년 시절을 장터 한마당에서 지낸 셈이다.
조선 영조 때 청계천 준설공사 때 을지로5가 쪽으로 퍼낸 토사가 조그만 산처럼 쌓이자 가산假山이라 불렀다. 야생화를 많이 심어 악취를 없애면서 방산芳山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종로5가 쪽의 이화동에는 배나무 과수원이 많았으므로 방산동과 이화동, 그리고 주교동의 청계천 4가 배다리 일대를 배고개라고 통칭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토산물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부터는 이윽고 배오개, 배우개시장으로 구개음화과정을 거쳤다.
6·25 후에 이 일대는 기존 시장의 쪼가리 땅마다 판자가게를 만들며 비집고 들어온 이북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다. 이들이 기존의 광장시장 상품을 소매로 팔다가 어느덧 위험하지만 이문이 많이 나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을 주 상품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어느덧 양키시장, 깡통시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미군 헌병이 들이닥쳐 압수할 때면 "떴다!" 소리와 후다닥 튀어다니며 물건을 감추거나 뺑소니치는 상인들로 난장판이 벌어지곤 했다. 우리집은 이 동네에서 아버지의 대장간과 거처를 합치면 부지만 해도 100여 평이 넘쳤다. 따라서 우리집 마당은 이들 판자가게들의 창고가 되었다.
양키시장이 활성화된 이후, 이 시장엔 세 번에 걸쳐 큰 불이 났다. 처음 두 차례의 화재는 요행히도 피했지만, 세 번째 불에는 우리집 역시 전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국가의 토지수용권이 발동되면서 우리집의 9할은 의정부에서 을지로5가,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기간도로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때의 화재가 군용도로 개설과 관련된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누가 밝힐 수 있었으랴.
이때가 1956년 1월경이었고 나는 국민학교 6학년 졸업반이었다. 한밤중에 잠옷만 대충 걸친 채 덜덜 떨면서도 그 화재로 인해 우리집 마당에 쌓여 있던 군용품들이 뻥뻥 터지면서 환타와 맥주의 노란 불길, 포도주스의 보라색 불길, 콜라의 초콜릿빛 불길이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쇼에 황홀해 하던 장면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한 장의 풍경이다. 이 때문에 나는 누군가 고향 이야기를 물을 때마다 이 시 한편을 읽어주곤 한다.
내 고향은 명왕성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버려졌다
한 생애 내내 곁에 있었던 그에게 주어진 134340호, 그게 명왕성의 새 이름이란다
그렇게 내 집도 버려져 길바닥에 뭉개졌다
을지로5가에서 청계천5가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하늘을 올려보던 창은 이제 그 아래 땅만 보여준다
아직도 발바닥에 묻어나는, 한련화며 채송화며,
거기서 피어나던 꽃들의 향기
한밤중이면 혼자서 깨어나 울던 형광등의 불빛이
방산동 4의 14, 손톱만큼 남은 땅의 지번을 보여준다
명왕성은 망원경 저편에서 어둡기 그지없지만
땅속의 내집에서는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어둡고 춥고 버려진 것들이 서로 껴안은
내 집에서는 명왕성을 등 대신 켜놓고 산다
마루 벽에 달아놓은 가족사진 액자,
어머니, 아버지, 형님들, 누이들을 환하게 비추어 준다
134340에 살기 싫은 명왕성은 이제
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렇게 나도 내 집을 다시 찾았다
내 가슴속에 내 집을 다시 지었다.
- 박제천,「내 고향은 명왕성」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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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2. 11월(253)호, 15쪽 <서울 이야기> 에서
* 박제천/ 서울 출생, 동국대 국문과, 1956~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장자시』『천기누설』등 16권, 저서 『박제천시전집(전5권)』『시업 50년 박제천시전집(전5권) 2차분』, 수상: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동국문학상, 현)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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