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가능할 꿈의 세계를/ 유혜자

검지 정숙자 2022. 12. 2. 01:26

<essay>

 

    가능할 꿈의 세계를

 

    유혜자/ 수필가

 

 

  1950년대 후반에 고등학교에 다닌 우리 세대는 전후 피폐해진 때여서 올바른 인격 형성과 도덕 중시의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궁핍한 이들이 많고 범죄자도 많아 불안하고 우울했다. 그때는 모두가 잘 살게 되는 희망과 꿈이 이뤄지길 바랐었다. 그런데도 슬픈 노래에 빠져들고 시도 슬픈 것이 가슴에 다가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중략···)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는 시 의 「엄숙한 시간」의 구절. 

  시적인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시집에서 우연히 읽었는데 공감되었다. 문학 취향의 국어선생님께서는 릴케의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를 꼭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 책을 대하게 되었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인 말테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파리에 왔고, 나는 문인이 되려는 꿈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권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진학했었다.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년)는 파리에서의 고독한 생활을 바탕으로 죽음과 고독을 주제로 한 소설인데, 말테가 파리의 거리와 사람들을 관찰하며 시인으로 다듬어져가는, 릴케의 내면을 반영한 고백서라고도 한다. 당시 파리라면 문화예술의 중심지, 멋과 낭만의 도시로 동경하던 처지인데 말테는 파리의 빈곤과 침체에 아연하여 파리에 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폐허로 복구가 덜 된 객지인 서울에서 외롭고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빈곤과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이웃이 안쓰러웠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예술적 응시의 세계를 그려나가는 릴케가 부러웠다.

  파리의 견문, 감상기, 메모와 추억, 그리고 일기 등 54개의 소단원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주인공의 생활, 유년 시대의 추억, 그리고 풍부한 독서의 추억 등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는 파리의 어두운 세계, 죽음과 불행이 버거워서 책 읽기를 멈추기도 했다. 말테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깊은 인생의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의문, 즉 죽음과 사랑을 발견하여 인간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구명을 해보려는 의도를 눈치 채기까지 몇 번이나 읽다가 중단해야 했다.

  당시 화제작인 실존주위 문학의 『이방인』(알베르 카뮈)이나 냉전시대여서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던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도 극적인 줄거리가 있는데 『말테의 수기』는 달랐다. 문학 장르로는 독일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는 『말테의 수기』는 일관된 스토리가 없어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말테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20세기가 안고 있는 커다란 의문에 대해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자신은 시민으로 자신과 이웃한 일련의 사건들이 공통적인 인간의 길임을 알게 되고, 그들을 주도면밀하게 주시한다.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며, 고독과 공포의 그늘만이 존재하는 곳을 구제해야 함을 알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리고 이웃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남자와 무도병자들의 모습에서, 이 도시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공포의 그늘로 빨려 들어가 병들게 된다.

  예술적 정신을 추구하면서도 시민의 삶과 죽음, 그들을 고독과 공포의 그늘에서 구제하려던 말테. 그 구제해야 함을 알면서 방법을 못 찾고 공포의 그늘로 빨려들어가 병드는 것에서 일단 절망했지만, 나는 그런 행동적인 것에 꿈을 둘 역량은 안 되고 좋은 문학을 하는 것만이 내가 기울여야 할 길이라고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경고문처럼 밑줄 치며 읽은 구절들이 있었는데 한 가지만 소개한다. "젊은 시절에 시 같은 것을 썼다고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는 기다려야만 한다. 평생을 걸고, 가능하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긴 일생을 걸고 의미와 꿀을 모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겨우 열 줄 정도의 좋은 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 여기서 시를 수필로 고쳐 읽는다. ▩ (p.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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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집·서울』 2022-11월(253)호 <고전에게 길을 묻다> 에서

  * 유혜자/ 『수필문학』(1972)으로 데뷔, 수필집『사막의 장미』(2009), 『스마트한 선택』(2013) 등 11권, 음악에세이음악의 정원(2007), 『음악의 에스프레시보』(2011) 등 5권, 한국문학상(1992), 한국펜문학상(2002), 조연현문학상 윤재천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