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강영은_ PPE(poem, photo, essay)『산수국 통신』「산수국 통신」

검지 정숙자 2022. 10. 13. 02:00

<강영은의 PPE(poem, photo, essay)> 中

 

    산수국 통신(전문)

 

    강영은

 

 

  10년 전, 반 귀향을 했다. 건강 때문이었지만 향수 달래기, 혹은 귀소본능이라는 명목하에 가족의 허락을 받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게 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중산간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처소는 하루 종일 한두 사람 올까 말까 한 외진 곳이다. 잡초를 뽑거나 집 앞에 늘어선 제밤나무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전부이지만, 느리게 하루를 소일하다 보면,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집 앞 계곡의 웅덩이에서 쏟아지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마당 가득 내려앉은 별무리들이 나를 지키는 호사 속에서 혼밥을 먹는 외로움만큼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진다.

 

  자유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위리안치된 중죄인처럼 자유를 받아든다. 나와 주고받는 말 외엔 말이 필요 없는 곳, 전후좌우로 보이는 것은 과수원을 둘러싼 돌담뿐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옆집은 그야말로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집이다. 폭은 좁고 길이가 긴 옆집을 가려면 '옆'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걸어야 한다.

 

  '길고 좁다란'은 '길다'와 '좁다랗다'는 두 단어가 '~고'라는 어미로 연결되어 '형용사형 서술어'를 이룬다. 형용사란 명사의 모양, 색깔, 성질, 크기, 개수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꾸며 주는 말이다.

  '길다'라는 형용사는 "잇닿아 있는 물체의 두 끝이 서로 멀다." 이어지는 시간상의 한때에서 다른 때까지의 동안이 오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다 아시다시피, '좁다랗다'라는 형용사는 "너비나 공간이 매우  좁다"라는 말이다. 이 낱말의 이미지는 목을 조이는 끈을 연상시키는 듯 아슬하지만 '~고'라는 연결어미에 힘입어, 갈등과 화해, 길항과 순항을 반복하는 내 마음의 공간을 불러내어 준다.

 

  동어반복을 지양하는 시작법의 측면에서 보면 '길고 좁다란'이란 말이 무려 10번 사용되어진 다음의 시는 실패작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길고 좁다란'이라는 말을 반복하여 뇌까릴 수밖에 없었다. '길고 좁다란'이란 말이 주술처럼 입술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길고 좁다란 닭 울음소리가 건너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이 젖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을 꽃피우고 싶어졌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 속에서 길고 좁다란 뱀을 꺼냈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에게 길고 좁다란 뱀을 먹였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을 가진 닭 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비 오는 북쪽이 닭 울음소리를 훔쳤겠지요 길고 좁다란 형용사만 그대 곁에 남았겠지요

 

  비 개어 청보라 빛 산수국 한 그루 피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산수국 피는 남쪽이고 싶었습니다

    -전문, 「산수국 통신」

 

  땅, 돌담, 뱀, 닭의 몸, 울음소리 등은 내 무의식에 걸쳐있는 그리움의 전형적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을 돌올하게 내세우는 '길고 좁다란' 수식어를 통해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산수국 꽃 피는 격동激動의 봄을 실재의 공간 속에 풀어놓고 싶었던 걸까, 심상과 실재 사이에 계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 시의 첫 구절은 가감 없이 흘러나온  표현이다.

 

  '길고 좁다란' 형용사를 남길 수밖에 없는 이 공간에 자발적으로 나는 나를 유폐시켰고 유배시켰다. 오늘도 좁고 기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기의 나날이, 비 오는 북쪽이 그대와 나를 가른다 해도 변함없이 피는 제주 산수국처럼 영원한 남쪽이 되고 싶다는 심연의 공간을 그대에게 타전하고 싶어진다. (p. 143~147)

 

  * 사진_오솔길(144쪽)/ 좁고 기다란 돌담(145쪽)/ 휴애리 수국축제-남원면 신례리(147쪽)/ 돌의 완결-돌창고(148쪽)/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195쪽) //  * 블로그주: 사진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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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영은 PPE(poem, photo, essay) 『산수국 통신』에서/ 2022. 8. 25. <황금알> 펴냄

  * 강영은/ 제주 서귀포 출생,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스스로 우는 꽃잎』『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 시론詩論』등, 산문집『눈잣나무에 부치는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