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엄지손가락의 그 피 한 방울
오세영
나의 유년시절은 철이 없었다. 동네 개구쟁이들과 뛰어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하지 않았다. 황룡강에 가서 헤엄을 치거나 물고기를 잡는 일, 들판의 종달새 집을 뒤져서 알들을 훔치는 일, 인근 산에 올라 칡을 캐는 일, 연날리기나 들불놀이 같은 것들에 골몰하는 일 따위에 더 신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일은 뒷전이었고 초등학교 시절의 내 성적은 항상 반에서 20등 내외를 면치 못했다.
결혼하신 지 채 2년도 되지 못한, 그러니까 나를 낳기도 전인 그해에 지아비(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시댁이 낯설어 그냥 친정에 눌러앉게 되셨다. 외가는 전라도의 소지주 집안이었다. 홀로된 딸과 외손 정도는 충분히 거둘 수 있는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돌연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 여파로 외조부를 잃은 외가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어머니와 나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이었던가. 이때부터 대학을 졸업하여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기까지의 그 긴 기간은 실로 내게 모진 시련의 연속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나는 철이 들지를 않았다. 여전히 공부하는 것보다는 노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나를 회초리 한 대 치지 않고 지켜보셨던, 당시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고 아프셨을까?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다른 때보다 좀 일찍 집에 돌아온 나는 문득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광경 하나를 목도하였다. 재봉틀을 돌리시던 어머니의 엄지손가락에서 방울방울 피가 흐르고 있지 않는가. 그간 생활비에 보태 쓰시려고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삯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것인데 천을 재봉질하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셨던 것이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어머니가 안쓰러워 보였다.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불쑥 "엄마, 아파"였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시더니 한참 만에 하시는 대꾸가 이랬다. "아니다. 네가 공부하지 않은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그 말씀에 미로소 철이 들었던 것일까 순간 나의 눈동자에서는 나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손에 책을 들었다.
그 자책감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마침내 우등생의 반열에 올랐다. 그 6개월 만에 어느덧 책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뜨신 지가 햇수로 벌써 45년이 된 어머니,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볼 수가 없다.
피 한 방울
오세영
펜에 잉크를 찍어
원고지에 꾹꾹 눌어 쓴 시 한 편,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공부를 몹시 싫어했던 내 어느 소년 시절, 삯바느질로 생계를 보태시면 어머니가
바늘에 속가가락을 찔려 뚝뚝 피를 흘리시던 모습,
- 엄마, 아파?
- 아니다. 네가 공부하지 않은 것보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그때 짓다 만 하얀 옥양목 두루마기의 깃에 번지던 그
순결한 피 한 방울.
내 오늘
셔츠에 단추를 달아주는 아내의 손놀림을 보면서
비로소 깨달았나니
내가 펜에 찍어 쓴 잉크는
기실 그 핏방울이었다는 것을.
꾹꾹 눌러쓴 원고지 한 페이지는
그 하양 옥양목 천이었다는 것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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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집 『곡선은 직선보다 아름답다』 p. 47~49/ 2022. 9. 30. <푸른사상사> 펴냄
* 오세영/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전남의 장성, 광주, 전북의 전주 등지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박목월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저서『한국 낭만주의 시 연구』『20세기 한국 시 연구』『한국 현대시 분석적 읽기』『문학이란 무엇인가』등 23권, 시집『무명연시』『밤하늘의 바둑판』『북양항로』등 27권, 기타 산문집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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