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란(발췌)
강영은
비바리는 제주에서 자생한 꽃이다
제주의 흙 속에 묻힌 진짜 뿌리가 아니면
잎과 줄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뿌리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마존 유역에는 몇 개씩 달고 다니는 부족도 있다
가짜가 피우는 것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이다
비바리는 바다를 길들이는 고래를 꿈꾼다
외로울수록 차고 높은 호흡을 내뿜는다
이어도를 바라보는 꽃은 그렇게 살촉을 매단다
도시마다 그녀를 복제하는 꽃집이 있다지만
손돌이추위 속에서도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선돌 앞이나
고래 심줄 같은 물줄기가 등을 껴안는
돈내코 부근에 암노루처럼 보짱한 그녀들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는 해발 900미터
눈 속을 달리는 두 다리가 섬 밖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곳이
그녀들의 북방한계선이다
-전문 (p. 90~92)
돈내코를 찾아간다. 어린 한란들이 서식한다는 숲길을 거닐어 본다. 아둔한 눈길에 보일 리가 없지만, 시린 물소리가 숨을 죽인 고요 속에서 눈을 감고 바람을 흠향한다. 삶의 어떤 추위에도 굴하지 않는 제주 여인의 맑고 청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임에도 상록활엽수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쓸쓸하지 않다. 계곡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꼭 그만큼 깊어진다. (p. 92)
* 사진_오솔길(144쪽)/ 좁고 기다란 돌담(145쪽)/ 휴애리 수국축제-남원면 신례리(147쪽)/ 돌의 완결-돌창고(148쪽)/ 어미닭과 병아리 그림(195쪽) // * 블로그주: 사진은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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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은 PPE(poem, photo, essay) 『산수국 통신』에서/ 2022. 8. 25. <황금알> 펴냄
* 강영은/ 제주 서귀포 출생, 2000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스스로 우는 꽃잎』『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녹색비단구렁이』『최초의 그늘』『풀등, 바다의 등』『마고의 항아리』『상냥한 시론詩論』등, 산문집『눈잣나무에 부치는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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