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과 백신(부분, 셋)
정해득/ 한신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천연두는 우리나라에서 두창痘瘡, 두창麻麻, 포창疱瘡, 손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연두를 피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왕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조선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천연두를 앓다가 죽었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와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이 천연두로 1달 반 사이에 연이어 죽고 말았다. 선조는 1603년 겨울에 아들, 딸, 손자가 불과 한 달 사이에 죽었고, 현종도 장녀 명선공주가 병을 앓다가 10일 만에 죽는 슬픔을 겪었다.
특히 현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에 천연두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670년과 1671년 2년에 걸쳐 지속된 대기근과 함께 질병이 창궐하였다. 현종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과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정치적으로는 예송논쟁에 휘말리며 잔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결국 30대 초반의 사이로 단명하고 말았다. 뒤이어 즉위한 숙종 시기에도 천연두는 극성이 멈추지 않아 왕비 인경왕후가 죽었으며 숙종 자신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위기를 잘 넘기고 회복되었다. 이렇듯이 조선에 유행한 천연두는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p. 208)
한편 같은 시기(1970, 정조)에 정약용도 천연두 예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정약용은 자녀 9명 중에 6명을 천연두로 잃었으며, 본인도 마마를 앓아 눈썹이 세 갈래가 되어 '삼미자三眉子‘라 칭하기도 하였다. 정양용은 1799년(정조 23) 복암 이기양(李基讓, 1744~1802, 58세)의 아들 이총억李寵億에게서 의주 사람들이 북경에서 발행된 『정씨종두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책을 구하여 인두법 가운데 상처가 아물 때 생기는 딱지를 갈아서 물에 녹인 다음 솜에 적셔 콧구멍에 넣는 수묘법水苗法을 터득하였다. (p. 210)
한양에서만 한꺼번에 6만 명이 넘는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었으니 그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시신을 매장할 공간 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정조는 군영에 명하여 민간 토지를 매입하여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철저하게 격리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하와일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임금이 시신 묻을 곳이 없는 가련한 백성들을 위해 슬퍼했다고 했다. 독감이 이럴진대 천연두, 실로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p. 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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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 2022-여름(144)호 <감염병과 백신>에서
* 정해득/ 현) 한신대학교 한국사회학과 교수, 조선시대 문화사 전공, 저서『조선 왕릉 제도 연구』『정조시대 현륭원 천봉과 수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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