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 생활 엿보기/ 헌인릉(부분)
강기옥/ 시인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왕릉은 단순히 임금님의 무덤이라고 하면 오산이다. 일반인의 죽음을 서거逝去 또는 졸卒이라 하고 임금님의 죽음을 붕어崩御 승하昇遐라 하듯 무덤의 명칭도 다르다. 일반인의 무덤을 묘墓라고 하는데 비해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이라 한다. 그러나 왕족이라 해도 세자, 세자빈, 임금의 아버지나 어머니, 빈嬪의 무덤은 원園이라 한다. 능은 곧 왕족 최고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같은 왕자라도 왕위에 올랐으면 그 무덤을 능이라 하지만 왕자로 죽으면 일반인처럼 묘라 한다. 광해군이나 연산군의 무덤을 능이라 하지 않고 '광해군 묘' '대원군 묘'라 하는 것은 그들이 반정으로 쫒겨나 왕자의 호칭인 "君"으로 강등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 숭배 사상의 첫 번째 겉치레는 무덤을 치장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더구나 아들이 임금이면 그 무덤의 장엄莊嚴은 화려의 극치를 이룬다. 그래서 왕릉은 역사의 생생한 기록물이다. 왕족의 공동묘지로는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이 있고 강남의 선정릉, 서초의 헌인릉 등이 있다. 그런데 어찌 헌인릉과 선정릉은 서삼릉이나 서오릉처럼 '남이릉'이라 하지 않고 선릉과 정릉을 합한 선정릉이라 할까? 또 헌릉과 인릉을 합하여 헌인릉이라 할까?
여기에는 홀수를 양, 짝수를 음으로 취급하는 음양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서오릉의 경우 왕릉이 5기, 원이 2기, 묘가 1기로 모두 8길의 무덤이 있는데도 서오릉이라 한다. 능 외의 다른 무덤은 숫자에서 제외하기 떄문이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주변의 왕릉은 선정릉이다. 한양의 남쪽에 있으니 남이릉이라 해야 하는데 남이릉이라 하지 앉고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을 합쳐 선정릉이라 한다. 태종 이방원의 헌릉과 순조의 인릉 역시 남이릉이라 하지 않고 헌인릉이라 한다. 태릉도 원래 명칭은 태강릉이다. 여장부 문정왕후의 태릉과 그의 아들 명종의 강릉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능이 하나만 있는 곳은 장릉이나 사릉처럼 그 능호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서초의 내곡동에는 태종 이방원의 무덤이 있다. 유독 태종은 태종이란 묘호廟號보다 이방원이라는 이름을 더 쉽게 부른다. 그와 더불어 이상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방간, 방번 등과 같이 모두 이름이 두 자다. 그런데 이방원의 아들부터는 이름이 외자다.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정조 이산 등처럼 어려운 한자의 한 자만을 택하여 이름을 지었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왕이 아닌 무신이었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인처럼 두 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이다. 그러나 이방원이 왕이 된 이후에는 고려의 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왕자의 이름을 외자로 지었다. 일반인은 왕명王名으로 사용한 한자를 이름으로 쓸 수 없다는 기휘忌諱 제도 때문이었다.
한글날이 있는 시월이면 헌릉이나 영릉을 찾아 고마운 마음을 표하면 어떨까? 헌릉을 찾는 것은 그렇게 포악을 떨면서까지 세종의 치세를 준비해 준 지혜(?)에 감사하기 위함이요 영릉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한글 창제는 물론 음악과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문화강국의 면모를 갖추어 준 세종의 업적에 감사하기 위함이다.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릉에서 택현(擇賢: 훌륭한 인재를 선택하는 일)으로 백성에게 세종과 같은 성군을 선물해 준 태종께 감사의 묵념을 올려보는 것도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온갖 외래어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우리 고유어의 순수를 생각하면서. (p. 176-178)
------------------
* 『가온문학』 2021-가을(29)호 <특집 연재 | 조선시대 궁 생활 엿보기>에서
* 강기옥/ 한국문협유적탐사연구위원장, 서초문화대학 문화해설사 지도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서초문인협회 회장, 『가온문학』 편집주간
'한 줄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학농민군의 2차 기병을 바라본 삼례(발췌)/ 신정일(문화사학자) (0) | 2022.06.14 |
---|---|
우주는 상상력이다(부분)/ 최지하 (0) | 2022.06.03 |
시집은 시인의 운명이다(부분)/ 장석주 (0) | 2022.05.12 |
나의 유년과 소년_나의 꿈은 문학인(부분)/ 송동균 (0) | 2022.05.03 |
시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부분)/ 유성호 (0) | 2022.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