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미래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는가(부분)
유성호/ 문학평론가
대체로 재앙은 진화와 발전이라는 유혹의 외피를 두른 채 찾아온다.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차곡차곡 축적해 왔던 인문적 통찰이나 점진적 역사의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인간의 존엄이나 존재 의미 등에 근본적 위협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한동안 이러한 행간에 비치는 어두움을 섬세한 감각으로 읽어 내는 역설적 절망을 불가피하게 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러한 그늘의 결을 읽어내고 표현하고 성찰하는 과정은 문학에 주어진 오래된 직임이었다. 특별히 가장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어법으로 첨예한 감성을 담아내는 시는 더더욱 세상 표면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속도전과 부박한 경쟁 논리 대신, 인간 본래의 위엄을 노래하는 과정을 통해 특유의 반反근대적 충동과 사유와 표현을 우리에게 건네 왔다. 최근 우리가 읽고 있는 시 작품들에 이러한 시의 지표와 역할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p. 27)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바이지만, 일부 젊은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른바 반反미학의 가능성으로서의 시적 움직임은 매우 광범위한 시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의 반反은유의 환유 원리에 의한 작법은 그동안 시의 중심 원리로 기능했던 은유 중심의 작법에 대해 방법적 반성을 제기하면서 자유로운 연상 형식을 통한 말의 난장을 치열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들은 오랫동안 시의 원리로 추앙받아 왔던 동일성 논리에 창조적 균열을 내면서 우리 시대의 시로 하여금 원심적 확장을 꾀하게 하였다. 그 안에는 화해와 조화의 세계보다는 길항과 갈등의 세계가 감기게 되었고, 대중문화나 새로운 매체 등이 일상적 표지로 빈번하게 등장하게 됨에 따라 그것들이 시의 표면 물질을 장식하게 되는 일도 잦아졌다. 의미론적 환원이라는 고전적 해석 과정도 부분적으로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시의 존재론적 확장에 기여했으면서도, 시에서 이루어지는 힘겨운 주체 정립의 의지나 자기 회귀의 열망 그리고 타자에 대한 지속적 성찰에 대한 몰이해를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망각과 소모의 열정으로부터 현실에 대한 감각과 능력을 복원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기율에 대한 섬세한 메타적 성찰을 다시 요청받게 된 것이다. (p. 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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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2021-겨울(47)호 <특집 문학이란 무엇이었는가> 에서
* 유성호/ 1999년 ⟪서울신문⟫으로 평론 부문 등단, 저서『서정의 건축술』『단정한 기억』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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