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가 기어간 자국
진기환/ 중국고전번역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께서는 설날이면 동네 아무개 할아버지한테 세배하고 오라고 시켰다. 친척도 아니었고 가까운 이웃도 아니었지만 다만 칠십이 넘은 노인이었기에 세배를 드려야만 했다.
지금 나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시구詩句를 넘어 팔십이 가까운 지금, 어떤 젊은이가 내게 세배를 온다면? 그럴 리도 없겠지만! 내가 받겠나? 천만에! 천만의 말씀이다.
6 · 25전쟁 중이던 1953년 4월,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짧게 14년을 학교에서 배웠고, 남들보다 많은 42년간을 학교에서 살았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는 일이 배움이었고 공부가 곧 나를 깨우치고 키우는 방편이자 삶이었다.
가는 붓으로는 작은 글씨를 써야 하고, 큰 붓을 잡았으면 큰 글자를 써야 한다. 대인만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내 키만큼의 등신等身의 책書을 써야만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지! 나는 두려움을 떨치고, 기회를 잡아 실천했다見機而作. 비록 못난 나였지만 내 뜻은 결코 작을 수 없었다.
2009년 2월. 1953년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았던 학교를 떠났다. 그러나 배움과는 떨어질 수 없었다. 부족한 공부를 채워가며 책을 저술했다. 중국의 옛 문하고가 사학, 철학 분야의 번역을 주로 했다.
퇴직 이후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돌아보면 아득한, 어리고 젊은 날의 아쉬움과 회한만이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지나온 자취를 돌아본다. 학교와 공부와 그리고 연구와 집필에 관련된 행적만을 돌아보며 자서전의 모양을 갖춰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을 몇 십 부 인쇄하였다. 이 책은 내가 욜심히 살았다는 기록으로서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우선 서문 부분에서 내가 왜 이런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야 했는가를 말했다. 본문 부분에서는, 그동안 펴낸 내 키만큼의 책等身書의 사진과 서문, 후기 등을 담고 논문 등을 해설했다. 또 문집과 각종 일기와 여행기 들 나의 개인기록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미에는 나의 짧은 공부 과정,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담았다. 겨우 200여 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나로서는 인생을 마무리하며 배움과 공부를 돌아본 책이다.
모든 것이 아쉽고 한없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 못난 사람의 한평생도 기록해 두어야 한다. 초라한 모습도 사실 그대로 진실된 마음으로 기록한다면 조금은 덜 부끄러울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 '근학칠십년'이라 했지만, 『논어論語』 구절대로 발분發奮하여 망식忘食하며 걱정을 잊고 기뻐할 수 있다면 아마 늙는 줄도 모를 것이다.
누가 내 자서전을 읽어주겠나?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인데, 자랑거리도 못 되는데! 그러면서 왜 굳이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이라고 거창한 제목을 붙였는가? 위인이나 영웅, 현인만을 위한 세상은 아니다. 보통 사람과 더 어리석고 못난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못난 사람이 없다면 누가 빛나고 이름을 떨칠 수 있겠는가?
어리석고 모자란 나는 세파를 견디며 살아왔다. 무능했지만 그래도 나아지려고 애를 쓰며 살았다. 남들이 뛰어갈 때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목표를 정하고 노력했기에, 조금 덜 부끄럽기에 나를 돌아본다.
지렁이가 기어가도 그 자국은 남는다. 내가 살았고 존재했던 세상이었기에 자취를 남기고 싶었다. 아들과 손자 손녀에게 내가 걸어온 역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들과 손자 손녀는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라고 당부하고 싶다.
어지러운 격변의 역사, 20세기 중반과 21세기 전반기를 살아온 내 기록 자체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생활사의 한 조각일 수 있다. 이 세앙에 무명초無名草와 쓸모없는 삶은 없다고 한다. 바람결에 날아오는 모래에 곧 묻히고 물결에 쓸려 금방 없어질 자취이지만, 그래도, 오늘, 이 글을 남겨야 한다. ▩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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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2-5월(247)호/ <삶의 나루> 에서
* 진기환/ 중국고전번역가 · 전 대동세무고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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