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시인의 곤궁과 시적 성취(부분)/ 정우봉

검지 정숙자 2022. 4. 28. 17:16

 

    시인의 곤궁과 시적 성취(부분)

 

    정우봉/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곤궁한 뒤에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시인은 획일화된 사회 규범과 자유로운 창조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한다. 사회 제도의 모순에 맞서 시인은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력을 바탕으로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런데 사회는 이러한 시인의 행위를 쉽게 받아들이거나 용납하지 못하며, 이에 따라 시인은 그 둘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난과 불행을 경험하게 된다. 위대한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 생애의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며 그것을 시적 성취로 끌어올린 존재였다.

  이와 관련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곤궁함을 겪은 뒤에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 속에는 '안락한 일상에 파묻혀 아무 문제의식 없이 지내는 사람은 사물의 참모습을 깊이 살필 수 없고, 따라서 좋은 시를 쓰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뜻에서 여기에 말한 '곤궁함'이란 경제적 가난함이나 개인적 삶의 궁핍함에 한정하지 않고, 좀 더 깊은 의미의 진지한 고통, 고뇌 및 시련의 체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해 한 작가가 고통과 불우를 경험하고, 마음속에 강렬한 고뇌의 정감을 축적함으로써 탁월한 문학 창작 재능을 획득하고 뛰어난 작품을 창출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의 고통, 고뇌, 시련은 창작 재능과 맺는 특수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 바, 창작 충동을 격발시키고 창작 재능을 발휘케 하여 심미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창출하는 데 유리하면서도 필요한 조건인 것이다.

  '곤궁한 뒤에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은 구양수(歐陽脩, 1007-1072, 65세/ 중국 송나라 때의 정치가,문인, 역사학자)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폭넓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으며, 문집 등의 서문을 쓸 때에 항용 끌어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듣건대 세상에서는 시인은 현달한 사람이 적고 곤궁한 사람은 많다고 한다. 어찌 그러하겠는가. 대개 세상에 전해진 시들은 옛날 곤궁한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이 많다. 무릇 선비가 지닌 것을 쌓아두고서도 세상에 펴보지 못하면 산수 사이에서 자유롭게 지내며 벌레, 물고기, 초목,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 등의 모습을 보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때때로 그 기이함을 찾다가 마음에 울적한 생각과 한스러움이 맺혀 쌓이면 원망과 풍자를 일으켜서 버려진 신하와 과부의 한탄을 말하고 보통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내뱉는다. 대개 곤궁하면 곤궁할수록 더욱 공교롭게 된다. 그러하니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곤궁을 겪은 뒤에 공교롭게 되는 것이다.(구양수, 매성유시집서)

 

  구양수가 매성유(1002~1060, 58세)의 시집에 붙인 글이다. 매성유는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매요신을 말한다. 이 글은 구양수가 40세(1046) 때에 지은 것으로, 그는 당시 범중엄(989-1052, 63세. 정치가, 문인) 등의 혁신 정치를 지지하다가 보수파의 시기를 사서 좌천되었던 때였다. 구양수의 불우한 심사가 가탁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구양수의 평을 들어야 매성유의 시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할 만큼 두 사람은 매우 막역한 사이였다.

  여기서 구양수는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곤궁을 겪은 뒤에야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곤궁함이라는 것은 개인 생활의 궁핍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경제적인 가난 등에 그치지 않고, 좀 더 깊은 의미의 진지한 고통과 좌절, 시련이 체험을 폭넓게 가리킨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곤궁함을 겪은 뒤에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 시인이 마음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 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속에 근심스런 생각이나 울분이 쌓이게 되고 이러한 울분을 글로 표현한다. 이때 시인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말하기 어려운 것까지를 그려내고 묘파해 낼 수 있다고 보았다. "벌레나 물고기, 초목과 바람 구름, 새와 짐승의 모습을 보고 그 기이함을 찾고, 인정의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감정의 미세한 부분까지를 포착해내고 사물의 참모습을 깊이 살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p. 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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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시학』 2022-봄(93)호 <연재산문>에서

  * 정유봉/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