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만드는 시간
이규리
열차가 달리는 동안 하늘은 개다 흐리다를 반복했다
터널을 몇 개 지나면서
창 쪽의 내가
가리개를 살며시 올렸다가
빛이 돌아오면
내리곤 했다
옆자리의 책 읽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게 나의 일
몇 차례 가리개를 올리고 내리는 동안
나는 책 읽는 사람 옆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으로 사는 게 퍽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둠과 밝음을 발명해내는 시간 안에는
반지하의 터널이 있고
옥탑의 가파름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들고 나는 마음은 왜 이토록 세심한가 쓸쓸할 때
하찮음은 몸에 밴 나의 일,
그게 누구라도
부디 가리개를 올리고 내릴 때의 힘이
고요하기를, 적당하였기를
햇빛을 조절하던 집중은 꽤 쓸 만했지만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모르게 끝나야 하지 않은가
책의 제목이 궁금했던 한 사람을 모르고
옆자리가 움푹 팬 것도 모르고
그 독서는 다음 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전문, 『문학인』, 2023-가을호
▶사랑과 하나인 자의식_ 이규리 시인의 아포리즘을 통해서 읽는 근작시(발췌)_ 천수호/ 시인
길들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관계의 삶이라면
영원히 길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예술의 삶이다. -이규리1)
언니의 이런 시 창작 작업은 모두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언니는 종종 그 심연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심연은 무엇일까? 심연은 심연을 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감지되는 보이지 않는 지점일 것이다."13)라고도 하고, "누구나 자신의 심연을 보는 일은 두려울 것이다. 보려 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연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는 것. 천신만고 끝에 왔다고 느껴지는 곳에서 다시 발을 버려야 하는 것."14)이라고도 한다.
박상수 평론가는 언니의 세 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해설에서 언니의 시를 읽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며, 심연을 수긍하고 심연을 잠재우"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언니의 시에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에 덧붙여 언니의 시에 "사랑과 하나인 언니의 자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언니의 신작 시와 근작 시를 읽으면서 언니의 사랑이 이제 언니의 섬세한 내면에서 밖으로 걸어 나와, 이 사회 제도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더 큰 사랑의 미래를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반갑다. 이렇듯 사랑을 향한 자의식은 언니가 말한 '질병'이 아니라 사회변화의 마법을 꿈꾸게 하는 축복이다. (p. 시 120-121/ 론 157-158)
1) 이규리 산문집 『시의 인기척』, 난다, 2019. 50쪽
13) 이규리 산문집 『사랑의 다른 이름』, 아침달, 228쪽
14) 이규리 산문집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난다,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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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4-봄(70)호 <신작 소시집(기발표작)/ 작품론> 에서
* 이규리/ 경북 문경 출생, 1994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앤디워홀의 생각』『뒷모습』『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당신은 첫눈입니까』등, 산문집『시의 인기척』『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사랑의 다른 이름』 등
* 천수호/ 경북 경산 출생, 2003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우울은 허밍』『수선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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