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3373

의식 외 1편/ 이만식

의식 외 1편     이만식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길가의 풀 한 포기에 의식이 있었다면  그리도 척박한 땅에 자리를 잡지는 않았겠지.  좀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가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풀이 지구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겠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동물원에 갇혀있는 사자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아무리 정교한 포위망을 구축해놓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필코,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했겠지.  그런 진화가 있었다면, 사람이 지배자가 되기 전에 사자가 제압했겠지.  사자의 강력한 힘에 비하면 인간은 연약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야    사람에게만 의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

세 개의 포도/ 이만식

세 개의 포도      이만식    1  포도가 있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2  개가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개는 포도를 먹는다.   3  개의 주인, 내가 본다.  식탁 위의 포도를 본다.  개가 포도를 먹는다.  포도가 맛있게 보인다.  포도를 먹는다.   식탁 위에 있는 포도와  개와 내가 먹는 포도를 본다.   식탁 위에 포도가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세 개의 포도"는 세 개의 시선과 연결된다. 첫 번째 포도는 무응시無凝視의 시선, 즉 아무도 바라본 자가 없는 포도, 두 번째 포도는 개가 바라본 포도, 세 번째 포도는 '내'가 바라본 포도이다. 개와 '나'의 시선에 포착된 포도는 그것을 바라본 시선들에 의해 해석된 포도이다. 그것은 닫힌 의미..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질경이꽃 외 2편      강문출    대학병원 심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를 봤습니다 오랜만에 가까이 앉아서 봤습니다 어릴 적 신작로 길섶에서 본 달구지 바퀴에 짓밟히고 뭇사람들 발자국에 짓밟혀 상처투성이인 질경이 같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던 그를 길섶 안쪽으로 옮겨주고 싶었습니다만 내 힘이 모자라고 그의 삶이 벅차서 호미나 만지막만지작하다 말았습니다 내가 시들어 가던 질경이 잎사귀에 손을 대자 잠시 생기가 도는데 그 작은 떨림이 천상으로 오르려는 마지막 날갯짓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울음보다 더 슬픈 웃음을 지었습니다 난생처음 대엿새 쉬었다 가겠거니 하고 병원에 들렀다가 온몸이 망가진 줄도 모르고 대엿새 만에 떠날 줄도 모르고 메스가 제 몸을 헤집었는데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웃었습니다 푸르게 웃기 위..

거미백합/ 강문출

거미백합      강문출    처음 봤을 때 포켓몬의 식스테일이 떠올랐어요   여섯 개의 희고 긴 꽃잎에 혼이 나갔거든요   저 꽃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다는 증거처럼요   벌 · 나비 윙윙대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여름날 뭉게구름을 탄 기분이었으니까요   꼬리가 여섯 자란 구미호를 생각했어요   자태가 이국적이라 속뜻을 모를 때가 가끔 있었고요   꽃은 해마다 새로 피지만 나는 늘 처음에 머물러 있어요   오랜 진행형은 활력도 되지만 갈수록 버거워요   꽃은 날마다 사랑을 생활하고 나는 늘 사랑을 공부해요       -전문-   해설> 한 문장: 이번 시집의 표제작 「거미백합」이 노래하는 사랑의 외곽선 또한 순수한 나신의 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미백합(Spider Lily)은 구미호를 모티브로 ..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바다 속의 램프      윤석산尹錫山    출렁일수록 바다는  頑强한 팔뚝 안에 갇혀버린다.  안개와 무덤, 그런 것 속으로  우리는 조금씩 자취를 감추어 가고  溺死할 수 없는 꿈을 부켜 안고  사내들은 떠나간다.  밤에도 늘 깨어 있는 바다.  燒酒와 불빛 속에 우리는 소멸해 가고,  물안개를 퍼내는  화물선의 눈은 붉게 취해버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진다.  젖은 장갑과 건포도뿐인 세상은,  누구도 램프를 밝힐 순 없다.  바다 기슭으로 파도의 푸른 욕망은 아나고  밀물에 묻혀 헤매는  게의 다리는 어둠을 썰어낸다.  어둠은 갈래갈래 찢긴 채  다시 바다에 깔린다.  떠나는 자여  눈물로 세상은 새로워지는가  우리는 모두 모래의 꿈을  베고 누웠다.  世界는 가장 황량한 바다.  ..

편지/ 윤석산(尹錫山)

편지     윤석산尹錫山    오뉴월 꽃그늘이 드리우는 마당으로 우체부는 산골 조카의 편지를 놓고 갔구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고 꽃씨를 떨구듯.   편지는 활짝 종이 등을 밝히며 서로를 파란 가슴을 맞대고 정겨운 사연을 속삭이고 있구나   찬연한 속삭임은 온 마당 가득한데, 꽃씨를 틔우듯 흰깁을 뜯으면 샘재봉 골짜기에 산딸기 익어가듯 조카는 예쁜 이야길 익혀 놨을까.   모두 흰 봉투에 숨결을 모두우며 꽃내음 흐르는 오뉴월 마당으로  「석 산 인아 저 씨 께」  아, 조카가 막 기어다니는 글씨 속에서 예쁜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구나.    -전문(p. 22)/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작>   * 블로그 註/ 깁: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Daum 검색)  ..

동시 2024.11.17

이찬_"길은 가면 뒤에 있다"(발췌)/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度  零下 二十度 地上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

예상했던 일 외 2편/ 이서화

예상했던 일 외 1편      이서하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대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별일/ 이서화

별일     이서화      별일이 많은 요즘  주위가 온통 환하다고 여긴다  별일이란 나누어진 일이고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다른 유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별일을 별들의 일이라고 여긴다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건  별 뜨는 하늘만큼  맑은 날들이라고 위안으로 삼는다  간혹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날  갑자기 내린 우박이 그치고  햇살이 비칠 때도 있듯  별꼴 모양의 별일들   그렇게 별의별 일들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조물주의 참견이 많았다는 뜻  보름달이 뜨고  저 무수한 별들의 참견으로  밤하늘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오늘과 어제가 맑았으므로  별일이란 무수히 떠서 빛나는 것이다   맑고 흐린 날  그 속의 바탕은 다르지 않다   오늘 밤은 별일 아니라는 듯  별이 떠 있다      -전문-  ..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장대가 있다 외 1편     정선희    아파트 공터 옆   긴 장대가 누워 있다 저 기다란, 나와 안면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하늘 높이를 조절하던   균형을 잡아 하늘 한쪽을 받치면 마당이 기울어지는   장대의 저 자세는 우리 집 감나무에게서 배운 것   내 마음이 옆집 석류나무 쪽으로 기운 것을 알아서   볼록하게 홍시로 채우고 싶었던 그 아이 볼을 다 보아서   그때마다 엄마는   구름을 타고 앉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지만   장대가 하늘을 치켜올리면 멍든 엄마도 없고   손이 밤도깨비 같은 아버지도 내 눈이 셋이래도 부족할 동생도 없고   그래, 인제 허공도 쉴 때가 되었지   뒷방 늙은이 같은 버려진 장대 끝   빈둥대는 추억을 손잡아 끈다    하늘이 텅 빈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