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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정선희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았다 파르르 손끝이 떨렸다   손 한 번 잡아준 적 없다고 울먹였다 너는 할 만큼 했어 옆에 있어 드렸잖니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을 누군가 대신 해주었다   엄마는 누구의 엄마였나요 왜 나는 기억하지 않았나요 돈은 아들들한테 다 물어다 주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 새, 어딜 보느라 엄마는 나를 볼 수 없었나요   나는 늘 맴돌았다 엄마의 포근한 소용돌이에 한 번이라도 젖어 들어 휘감기고 싶었다   괜히 나를 낳았다고 했다 실수도 어쩌다가도 아니고   정말 싫었던 괜히라는 말 어느 날 괜히 버려질 것 같은 아니 어느 날이 언제인지 몰라 괜히만 키웠던 눈치의 날들   엄마가 죽기 전에 꼭 물어봐야 한다  왜 나를 주워 온 아이 취급했나..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안전은 쓰레기 같은 것*    정채원    오래전 부서진 누군가가  손짓하며 부르는 듯   4천 미터 해저로 들어간 거다  23만 달러를 내고 잠수정을 타고   심해 관광을 떠날 때  사인을 했다, 쓰레기는 두고 간다고  죽어도, 불구가 돼도, 책임 물을 일 없다고   억만장자 전 재산을 세상에 남겨 두고  몸만 떠난 거다   한동안 잠수를 타다  영영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르면서도 다 아는 척   언제고 동침할 수 있는 죽음이  두근두근 떠다니는  황홀한 심해心海에는   더 이상 부서질 일 없는 난파선이 상주하고 있다     -전문(p. 67)    * 미국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 설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스톡턴 러시의 말. 그가 조종했던 잠수정 '타이탄(난파선..

풀등의 노래/ 이명훈

풀등의 노래     이명훈    열두 살 사내가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정선 장터에서 미쳐 춤추는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으신지요.   그 말을 가슴 뒤에 세워 놓은 탓에 국졸로 술을 마셔도, 늘 풀매미 같은 슬픔, 지금도 보내지 못하고 있지요. 막노동 끝에 술에 취해 빙판길에 헛발을 디뎌 생과 사의 균형을 헤맬 때도, 강아지풀 무리처럼 흔들리며 웃을 때는   저승사자 앞에서도 실없이 웃었을 광철.  새가 밤으로 들어간 사이 가등 아래 떨어져 누운 매미를 손으로 잡았을 때, 매미의 울음소리가 조장을 끝내는 라마교의 경전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그 불편한 경소리를 붙잡고 밤 깊숙이 서 있는 동안 물이 물을 끌고 흘러가는 것도 봤지요.   이 삼복더위 속에서도..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초가지붕, 화양연화 외 1편      이혜선    마당 가득 샛노란 이엉 뭉치가 쌓인 날, 동짓달 초하루 바람 자는 날 남늪아재 덕암양반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 키 큰 옹칠이 아재가 아래에서 두루마리 이엉뭉치를 올려주면 위에서 받아 추녀의 끝에서부터 두루루 펼쳐 지붕 전체를 꼭 안아주었다. 빗자루로 스윽스윽 쓸어서 볏짚이 골고루 퍼지면 새끼줄로 동여매어 꼭꼭 눌러주었다. 정침과 사랑채를 사방 돌아가며 추녀 끝에 삐죽 내민 볏짚을 가지런히 면도해주면 짧은 동짓달 해가 어느덧 똥맷등 너머로 꼴깍 숨었다. 머릿수건 벗어 툭툭 털어 땀을 닦고 횃불 아래 둘러앉은 저녁상에 막걸리 덕담이 구수하다   지금도 바람맞이 산고개 넘다가 되돌아보는 그  높은 음자리표    -전문(p. 106)      ---..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내 어린 왕자에게 1      이혜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밤새워 내린 가을비 속속들이 울음 우는 들녘  푸르게 푸르게 젖어드는 이  내 그대 가슴에 들게 하여 나를 적시는 이  나보다 더 내 속을 잘 아시는 이   불을 내면 불로 끄다, 물에 타오른다     -전문-   서정을 말하다> 부분: 시는, 일상의 굴레에 매여, 또는 그날이 그날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 기계적으로 걸어가는 우리 삶을 일깨우고 쓰다듬어 꿈을 꾸게 하고, 묻혀 버린 삶의 핵심에 가닿게 만들어 준다.  시는, 그리움을 더 그립게 하고, 사랑을 더 사랑하게 하고, 슬픔과 아픔의 껍질을 깨어 더 슬프고 더 아프게 하여 치유에 다가가게 한다. 잠든 영혼을 깨워서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심안心眼과 혜안慧眼을 가지게 한다. 시는 ..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이난희

이 다리 건너기를 만 번을 하옵소서         만안교      이난희    글을 읽다 멈추고 그대로 집을 나섭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오늘이 마침 일요일입니다   관악역을 나와 걷다 보니  정교하게 몸을 붙인 홍예수문으로  안온한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립니다   다섯 칸을 계획했던 홍예수문을  일곱 칸으로 개축한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일   다리 건너편 소나무에  몸을 기댄 바람도 한적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려고 하지 않아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만세萬世에 걸쳐  백성들을 편안便安하게 하는 다리라 이름 지은  200여 년 전 임금의 염원이 장대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군주의 애민은 염려를 감당하고  염려는 방도를 생각하였으므로   하천을 건너려고 옷을 걷어 올리지 않..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생각, 잠시 외 1편      김비주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나무로 만든 시디집을 보다 그 위에 올린  인조 선인장을 봅니다  봄빛이 나무와 꽃들의 잎을 간질이는 계절에  붙박이 되어 한 줌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고독한 이의 그늘이 따라다니는 환한 아침을  생각합니다  누구는 언어의 집을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자유로운 전원의 테마집을 생각하고  집의 상상만큼 길어져 가는 팔이 자판을 두드리고  몰래 한 사랑처럼 전등의 밝기가 어두운 지금  웃으며 달아나는 생각들은 무엇인가요  고요에 익숙한 풍경은 숨을 내쉬지 않고  들이마십니다  책들을 꺼낸 봉투는 덩그마니 잃어버린 몸을  잠시 기억하다 잠깐 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집을 꺼낸 오늘은 투명한 햇살 아래  잡다한 생각을 합니..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시, 봄은 환몽      김비주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를 본다  흘러내린 자국마다 뒷짐 진 그녀들이 온다  어제 내린 러브체인의 날개들을  사랑초 나비에 얹어 물끄러미 표지를 읽는 시간,  흩어진 표지들을 봄 햇살에 태워 주먹 쥐고  쪼그리고 앉아, 마이클이 주었던 연적을 손에 쥔다  파란 눈의 사내가 한국도자기를 가방에 넣어  절 단청을 기웃거릴 동안, 달과 6펜스를 부산역  한 모퉁이에서 읽어내며 수양버들은 슬프다는  영어의 표지를 읽어내던 시간, 잠시 춘몽이었다   봄은 나른하고 시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동안  표지에 실린 속삭임을 들으며 일어서는 동안  환몽이다  표지들이 뱉어내는 시각, 사랑초 흐드러지다  햇빛에 걸린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쪽문"을 열고 "시들의 표지"..

희우루/ 이난희

희우루     이난희    폭염 속에  소나기 쏟아집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잦은 현상입니다   비를 피해 성정각 누마루 아래 들었습니다  빗소리에 고요는 더 지경을 넓힙니다   왕세자의 공부방은 열려 있습니다  한 나라를 짊어질 사람의 마음을 짐작 못 하듯  훗날 어떻게 기록될지 그도 짐작 못 했겠지요   돌계단을 딛고 빗물이 내려가는데  그냥 찾아온 생각들   요즘엔 기쁜 소식이 정말 뜸하지 뭡니까   비가 내려서 반갑고  비가 그쳐서 반가운 마음이 교차합니다   시시콜콜  소소한   뭐 그런 반가웠던 소식들을 불러 모아  누각 동쪽으로 향합니다   喜雨樓   가뭄 끝에 내린 비의 기쁨을  함께하고파 이름 지은  왕의 마음이  춤을 추듯 편액에 새겨 있습니다   희우루     희우루       발음하는..

신뢰/ 윤석산(尹錫山)

신뢰     윤석산尹錫山    파도가 아무리 무서운 기세로 몰려와도  모래들은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희디흰 몸뚱일 끌어안고  파도를 견디며, 안간힘을 쓴다.   비록 작디작은 몸통이지만  수만, 수억의 몸통을 서로가 서로를  껴안는 신뢰만 있다면   아무리 사납게 밀려드는 파도라도  그만 나뒹굴며 허연 거품으로  널브러지고 마는구나.  이내 모래알 사이 온몸 스미어 숨죽이고  마는구나.      -전문(p. 57)   -------------------  * 『계간파란』 2024-가을(34)호 에서  * 윤석산尹錫山/ 1967년《중앙일보》신춘문예(동시) & 1974년《경향신문》신춘문예(시)로 등단, 시집『절개지』등, 저서『동학교조 수운 최제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