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정숙자 숲 정숙자 말이 추려진다 살아남은 말은 꽃보다 별보다 바람과 바람 사이 나비보 다 향긋하다 말들은 견고함을 지향한다 한 마디의 말은 꿈틀대고 한 무더기의 말은 출렁거린다 폭풍을 유발한다 시간은 그것을 흐름이라 말한다 넉넉하다 말은 예전에도 오늘도 묘한 뼈를 숨기기에 푸른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0
지구여행권/ 정숙자 지구여행권 정숙자 우리 집 살림살이 여행보다 책이 알맞다 초원이나 내뻗은 강 눈앞에 없을지라도 책 속에는 한 그 루 보리수가 자란다 가지를 따라 하늘이 넓어지고 새들이 날고 잎새들 달랑 달랑 바람을 닦는다 오래된 책들은 어느 갈피에서도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귀 시린 누옥에 군..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0
물별에 대한 주석/ 정숙자 물별에 대한 주석 정숙자 물결이 햇빛을 반사할 때 생기는 반짝거림을 한 마디로 표현할 낱말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다보면 문장의 리듬이 풀어져 버리고 말지요. 조어가 절실했습니다. 가령 "오늘 오후, 버스 타고 한강을 지나는데 물별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라고 하면 금방 통..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둥근 책/ 정숙자 둥근 책 정숙자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갈피마다 바람 불고 여백에서 풀이 자란다 행간을 타고 세월이 흘러든다 오후 네 시/금요일/시월쯤으로 해 두자 이 모두가 쉰셋의 각도로 기울어진 나의 오늘이다 ․인간은 인간적일 때만 인간이다 ․열심히 기는 것이 나는 것이다 ․죽..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전일 상품/ 정숙자 전일 상품 정숙자 먹다. 먹히다먹힌다먹혔다. 사라짐이 보이는 흐름이다. 먹는다먹었다,가 아니다. 먹히는 쪽은 늘상 눈을 뜨고도 먹 는 쪽을 먹지 못한다. 시냇물 대 바다의 관계를 신은 왜 풍 경으로 설정하였나. 그 단순한 그래프 아래 소용돌이치고 술렁이고 쓰러지는 줄기들. 밤낮으..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이인일실(二人一室)/ 정숙자 이인일실二人一室 정숙자 해돋이마다 물을 갈아준다 그러나 내 환부가 아무는 만큼 꽃들은 죽어간다 물도 깜깜 썩어간다 그럼에도 꽃은 물은 서로를 돕고 있다 끝까지 살고 있다, -이것이 고요다 고요의 몸빛이다 담담히 에두르고 서 있는 꽃병 그만 자살에의 욕구를 내려 놓는다 몇십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내 오십의 부록 정숙자 편지는 내 징검다리 첫 돌이었다 어릴 적엔 동네 할머니들 대필로 편지를 썼고 고향 떠난 뒤로는 아버님께 가용돈 부쳐드리며 “제 걱정은 마세요” 편지를 썼다 매일 밤 내 동생 인자에게 편지를 썼고 두례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인이 되고부터는 책 보내온 문인..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간장병과 식초병/ 정숙자 간장병과 식초병 -無爲集 1 정숙자 나에게는 요즘 새로운 손짭손 하나가 생겼다 신문이나 전단 등에서 하루살이로는 아까운 그림을 솎아 엽서로 만드는 일이다 반듯하게 마름질한 아트지에 풍경들을 앉혀놓으면 웬만 한 시보다 따뜻하다 맑아지는 하늘이 세상 밖이다 그 살붙이들 곁에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9
무료한 날의 몽상/ 정숙자 무료한 날의 몽상 -無爲集 2 정숙자 막대기가 셋이면 <시>자字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자字 쓸 수 있을까 땀과 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물굽이로 햇빛으로 돌아간 다음 남은 뼈 오롯이 추려 시 시 시 시 시 시 '' 이렇게 놓아다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
멈춤, 상상의 속도/ 정숙자 멈춤, 상상의 속도 -無爲集 3 정숙자 게으름은 게으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제다 게으름에는 규칙이 없다 게으르다는 점 외에는 죄목도 없다 게으른 이의 침묵은 완만하다 그들은 도모하지 않는다 실패/실망/원성도 모른다 게으 름은 땀 흘리던 무릎의 마지막 도약 누군들 세월을 의욕..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