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정숙자 백야 정숙자 찌르지 말아다오 어르지 말아다오 모기가 0.5g일 때 당신 체중은 오륙십 킬로그램 1×2=2 / 2×4=8 당신한테 물리면 나는 십이만 배로 가렵다 가만두어도 끓는 열대야 또르르 또르르 똘 또르르 귀뚜리 귀뚫이야 어서 와다오 -『시안』1999. 겨울호 ------------- * 시집『열매보다..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5
길에 대한 리서치/ 정숙자 길에 대한 리서치 정숙자 정다운 오솔길, 얼었다 풀린 진흙길, 예기치 않은 빙판 길, 돌아나온 골목길, 땡볕 깔린 자갈길, 툭 터진 바람길, 별 쏟은 난바닷길, 앞뒤 모를 굽이길, 구름 고운 뒤안길, 하늘 만 믿는 비탈길… 자!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 -『 애지』2005. 봄호 ------------- *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나의 니르바나/ 정숙자 나의 니르바나 정숙자 화엄경 첫 장만한 우리 집 거실에서 의자 깊숙이 구겨져 묻힌, 나는 몇 십 년 뒤적거린 사고의 무덤이다 일 년에 한 번쯤 흙 돋우고 더러더러 잡풀 줄거리 들추어내는 그쯤으로 나는 무덤을 돌본다 잔디 뿌리와 머나먼 하늘 사이, 모처럼 정화된 시간이󰡒�..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한 바퀴/ 정숙자 한 바퀴 정숙자 발이 머리로 들어온다 우울한 발은 머리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안개에 질리고, 바람에 막히고, 소신만이 푸른 발 사유 속으로 진입한 발은 하늘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신발이 닳지 않는다 길을 재지도 않는다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다 발이 창공으로 날아간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평균풍속/ 정숙자 평균풍속 정숙자 나무가 풀을 먹는 걸 보았다 너른 그늘 속에 자디잔 이빨을 숨기고 있는 걸 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꽃밭 커다란 사과나무가 풀뿌리들을 씹는 소리가 났다 내 신발 문수가 더 커지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은 얼마나 많은 근동의 별을 먹었을까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파야 할 땅은 시간이다/ 정숙자 파야 할 땅은 시간이다 정숙자 속도보다 각도를 근심한다 빠르지만, 새들의 하늘엔 역사가 없다 그저 빠르기만 한 속도로는 새로운 흐름을 열지 못한다 한 눈금일지라도 미래를 바꿔야 나는(飛) 것이다 밤 깊어 귀 기울이면 미세한 소리가 반짝거린다 표면에서 부푼 마찰음과는 다르다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날짜변경선/ 정숙자 날짜변경선 정숙자 떨어진 동백꽃은 곧바로 깊은 잠이다 고른 숨소리가 섬세한 파도들을 뭍으로 해안으로 밀어 보낸다 그 시름없는 주름살 사이, 평화는 무게를 갖지 않는 공기였던가 수십 년 배웅한 얼굴 한 치 앞이 안 보여 퍼덕인 얼굴 삶을 일으키려고 뒷골목 드나든 얼굴 노도(怒濤)..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물은 한 방울로 태어난다/ 정숙자 물은 한 방울로 태어난다 정숙자 한 방울의 물은 물의 씨앗이다 떨어지는 순간 껍질을 깨고 다른 물방울의 손을 잡는다 떠나는 발자국 소리가 난다 눈 뜰 겨를도 없이 숨진 물방울에게, 더는 크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물방울에게 까닭을 물어서는 안 된다 심어진 처음 자리가 이미 많은 얘..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3
새해, 새벽/ 정숙자 새해, 새벽 정숙자 새로 세 시 반이 새로 세 시 반을 지나고 있다. 새로 세 시 반은 새로 세 시 반 외에 다른 시간을 지나지 못한다. 새로 세 시 반은 나의 삶이다. 내 흉부를 떼어 벽에 건다면 각종 사유와 희로애락이 시간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원을 그리며 돌 것이다. 묵은 발자국..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2
문인목/ 정숙자 문인목* 정숙자 1 또 팔뚝 하나 바람이 끌고 간다 온몸 딸려나간다 억누른 신음만이 제자리 박혀 일만이천 봉우리를 접는다 2 이 하루 저 한 해가 비틀고 더듬는다 서성이는 그림자, 술렁이는 목소리, 청룡언월도 숨겨둔 구름 짧은 칼도 피에는 깊다 3 물결치는 뭇 산 웃고 넘는 삶 너도 산 .. 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201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