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흘러가는 방향
고명자
풀벌레가 쩌렁쩌렁 울어 무수히 별이 진다 갈참나무 둔덕 위 오로라는 엿볼 게 많아 손등을 꼬집어보았지만 꿈은 아니다 별의 발가락은 줄톱처럼 날카로웠다 손 내밀지 마라 가만가만 듣기만 하여라 평생 너의 머리맡을 맴돌 우주일 것이다 별은 제 몸에서 발아된 빛에 찔려가면서 비비적비비적 풀을 붙잡고 운다
누가 더 긴 울음을 지녔는지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척이는 밤이다 바닥에 귀를 대면 돌아누워 하늘에 귀를 대면 천지간에 그림움인 듯 밤이 환하다 넝쿨덤불이 불 불 불 일어서는 폐허의 성 세입자인 나도 필경 몇 백 광년 전 별이었을 것이다 다시 몇 백 광년 잠들다 깨이면 더듬이와 다리가 길어지고 날개도 돋아있을 것이다 덤불이 사라진 곳까지 날다 겨드랑이를 쓱쓱 비벼대면 폐허의 세상이 노래로 가득할 거야
물병자리별은 북쪽으로 더 기울었다 잎잎이 추위 들었다 별도 풀벌레도 한꺼번에 죽어버린 아침 천지간에 기댈 것 없던 목매임도 사라졌다 두 발을 비비적거렸지만 꿈이 아니다 나를 끌고 다니던 오로라 삐죽하고 울퉁불퉁하다 돌멩이만 뒹구는 공터 어젯밤 동네 여자가 몰래 쓰레기를 내다 버린 공터 그 따위들만 수북한 공터
휘 휘 휘 휘 귓속이 운다 속수무책 우거졌던 넝쿨덤불이 슬어놓은 거짓말
-전문(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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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 2023-가을(91)호 <신작시> 에서
* 고명자/ 2005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술병들의 묘지』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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