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황색 점등의 시간 외 1편/ 백명희

검지 정숙자 2024. 1. 7. 02:21

 

    황색 점등의 시간 외 1편

 

     백명희

 

 

  신호등의 변심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어서 달려오라던 에메랄드빛 웃음도

  이쯤에서 멈추라는 저 흐린 눈빛도 진심이다

  긴 한숨 속에 지루한 빨간불을 견딜지

  가슴에 비상등 켜고 이대로 액셀을 밟을지

  때마다 오는 선택의 시간이 싫을 뿐이다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도 알고

  시나브로 변하는 마음도 알지만

  황색 점등의 순간에야 보이던

  좁힐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리

  당신은 이미 교차로를 떠났고

  정지선 앞에 나는 얼어 있다

  뒤돌아보지 않던 당신의 뒷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

 

  때마다 변하는 마음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꼬리도 물지 못하고

  교차로에서 자꾸만 발이 묶이는 내가 싫은

  황색 점멸이다

     -전문(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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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끝에서 길을 잃다

 

 

  악어 떼처럼 몰려든 압류 청구서들을 들고

  체념하듯 찾은 현금인출기 앞

  어둡고 좁은 현실의 늪 속으로

  궁색하기만 한 월급 통장을 밀어 넣는다

  치열했던 한 달 간의 사투가

  세상의 언어들로 재배열되는 시간,

  이제 곧 잔고 0의 지뢰가 터질 텐데

  건조한 목소리로 종료를 알리는

  인출기의 화면은 표정이 없다

  무참하게 물어뜯긴 월급 통장과

  또다시 이월시켜야 하는 아이들과의 약속,

  습기를 머금지 못하는 바람들을

  영수증과 함께 버리는 월말은

  건기의 초원처럼 목마르다

  새로울 거 없는 달의 끝

  거리는 온통 무중력 상태

  비는 언제쯤 오는 것일까

  연체된 꿈에 이자를 붙여 본다

      -전문(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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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달의 끝에서 길을 잃다』에서/ 2023. 12. 18. <시작> 펴냄

  * 백명희/ 2015년『미네르바』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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