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85

측면의 정면/ 정숙자(鄭淑子)

측면의 정면 정숙자鄭淑子 내일이야 어찌 알겠습니까 여태도 그래왔는데 이 일 저 일 눈보라 겹치다보면 안정된 고통권 생기더군요, 좀 야릇하지만 의문을 풀어볼까요 어떤 난국도 되풀이··· 왕왕 터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응에 붙들리게 되더라고요 지금 살아있음, 아직 붙어있음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고 뭐겠어요. 그리고 그것이 생애를 다듬어내는 언월도라는 걸 '곰곰' 곰탱이 쌍둥이가 쥐고 있어요. 안정된 고통권이란 익숙히 고통에 탑승한 자라는 거죠. 고통을 고공으로 바꾼 자, 혹은 농으로 바꾸는 자라고 일컬어도 무방합니다. 고통이야말로 지평을 박차고 → ↑ 뚫고 나가는 로켓이니까요 어디로? 그야 물론 신세계죠 제아무리 쩌렁한 친구라 해도 '겨우'의 순간에 얽혀들지 않을 순 없죠. '겨우'는 추락 직전 혹은 살..

범선/ 정숙자

범선 정숙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한시도 쉬지 않고 발목 깊은 섬들을 높이 세우고 자신도 모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미지를 목표로 무작정 가보는 것일까 아닐 거야. 내 눈엔 안 보이지만 그는 정확히 가고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열심히 치밀히 꾸준히 갈 수가 있지? 절대로 눈물에 빠질 리도 없어. 그는 이미 온몸이 눈물로 채워졌으니, 모두들 섬이라 부르지만 저건 섬이 아니라 돛이야 46억 년 동안이나 범선의 항해를 도운, 비트적대거나 비굴을 모르는, 방향과 푯대이지 바다는 오래 전에 지구를 떠났을 거야. 지구에 담겨 있대서 지구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지. 저렇게 열심히 치밀히 꾸준히 저어온 노정이 얼만데 여태 제자리걸음이겠어? 저 출렁거림은 여운이야. 절망은..

사라진 말들의 유해

사라진 말들의 유해 정숙자 현장을 떠난 말들이 붓두껍 속에 고이는 걸까 침묵을 건넌 말들이 거기 머물러 씨앗이 된다는 걸까 어디선가 다친 말 묻어버린 말 쓰러진 말 바람 소리 날려보지도 못한 하늘, 곳곳에 뿌려진 타인의 말도 때로는 익명의 필묵에 맺혀 가만가만 익어간다는 것일까 살얼음을 끼고 창가에 당도한 아침 입 속에서, 어깨뼈에서 덜컹덜컹 흔들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의 생존의 빙벽 어떤 회로를 타고 창궐했는지 구밀복검口蜜腹劍, 참으로 당돌한 팔매질이다 말을 떠나서는 말이 될 수 없는 말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자다' 이런 말이 공공연한 주술이 된 지도 오래! 말없이도 말이 되던 말다운 말 어떤 말에도 파묻히지 아니하던 실다운 말 그리운 그리, 운 말들 사라지는데 슬픈 문장이 멀리서 온다 -『들소리문..

죽음의 확장/ 정숙자

죽음의 확장 - 미망인 정숙자 하나의 죽음은 또 하나의 죽음을 안내한다 조금씩 조금씩 낯설지 않게 친숙의 문까지를 열어 보인다 고요한··· 고독 그것에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온종일 전화 벨 한 옥타브 튀지 않아도 새소리만 멀리 걸려도, 중심에 죽음이 있다 일주일은 왜 열흘이 아니고 칠일인가? 그런 촉박促迫도 어지간히 둥글어졌다 삶이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먼저 ‘ㅁ’이 그리고 ‘ㄹ’이 그리고 ‘사’만 남는다. 거기서 또 한 획 멀어진다면 ‘시’만이 남게 되겠지. 최후까지 남는 게 시였다니! 그리고 조금 더 훗날 ‘ㅅ’만 남게 된대도 내게는 태양이야. 시옷, 시옷이니까. 홀로 떠 있다 보면 어떤 돌이나 행성이라도 바람과 안개에 의해 그 긁힘과 마모에 의해 최종의 뼈마저도 해체/봉인되겠지 그리고 다시, 거..

측면의 빛/ 정숙자

측면의 빛 정숙자 비껴서는 소리 굴러간다 어둠이 멈칫한다 점점 떠오르는 저 맑은 소리 속이 꽉 찬 구일까 (그렇다면) 수정구일까 결코 드러나지 않지만, 없지는 않은··· 주름진 바람 편집하는··· 기시감도 사뿐히 밀고 나아가는··· 뻐꾸기가 정확히 열두 번 중얼거린다 00:00인 적 있다고 하지 23:59:60 사이, 그 찰나에 혼돈을 부여하며 흩어진/흩어지는 급팽창은 가설일까? 같은 차원에 살지만 각기 다른 차원을 사는 우리들 굴절과 모호에 찔린 응시뿐인 한 밤 깊숙이 세워 달만큼만 여위거라 굶기는 침묵 -『시에』2016-봄호 --------------------------- * 시집 『공검 & 굴원』(1부/ p. 42-43)에서/ 2022. 5. 16.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

허무를 보았으므로/ 정숙자

허무를 보았으므로 정숙자 하늘은, 딱히 누구를 지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십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각도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비었지만 새로운 점 하나 찍지도 않고 그것이 그것인 얼룩만 뭉쳤다 푼다 그 하늘 가장자리서 그 하늘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그런데 왜 영문도 모른 채 뒤집어지고 꺾이고 휘말리고 찔리지 않는 날 없는 것일까 깎아지른 각오 한 줄 없이 어떻게 남은 생 건너갈 수 있으랴 내일까지만 밟히고 아니 한 사흘만 더 짓밟히고 강철커튼 한 벌 만들어 입어야겠다 현관에도 입히고 지붕에도 입히고 창문에도 입히고 심지어 침대와 천장에도 입혀두리라 그 투명강철커튼은 (바위가 닳도록) 수비지향의 의상임을 하늘 깊숙이 일러두리라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고작 강철커튼이나 구상하는 것이다 가..

휨 현상/ 정숙자

휨 현상 - 미망인 정숙자 침대에서 일으킨 발자국 거실로 이어진 아침 가로 놓인 테이블, 찻주전자, 펜랙(penrack)··· 한 치도 변한 게 없다 쓰다 만 노트, 리모컨, 시계···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시간은, 다만, 밤사이 아침은 항상 그만큼의 선도로 새하얗다 어떤 아침을 막론하고 간밤에 펼쳐놓은 종이 한 장 그대로, 누군가 터치하기 전에는 어느 외계에서 덩굴손 뻗쳐오기 전에는 유리창의 순수 앞지르기 전에는 절대 신뢰의 백지 한 장 그런데 그 종이가 북 찢어져 있는 걸 멀쩡한 의식으로 본 적이 있다 쓰다만 원고, 의자, 실내화, 세절기··· 모두 젖어 있었다 심지어 튼튼한 책상의 무르팍까지 아니, 그 다리 밑으로 종이 한 장이 두 쪽이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내려가고 있었다 - 『예..

랑그의 강/ 정숙자

랑그의 강 정숙자 이제 나는 그가 된다. 그가 열다 만 골목, 그가 띄우다 만 달빛, 그가 젓다 만 물살··· 먼 데까지··· 식물들이 습득한 일념을 빌려 쓰고자 한다. 알 수 없지만 장차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어떤 초상일지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머나먼 강둑에서 만나게 될, 그를 침묵과 함께 출발시키려 한다 나란히 날아가는 두 마리의 잠자리. 이 둘은 멈추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구름이 바람이 구름이 바람이 뒤로 밀릴 뿐. 이 둘은 서로 놓치지 도 달아나지도 않는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를 현상을 놓아 보낸다. 예사로운 하늘만이 예스러운 내가 아직 흙이었을 때 뿔뿔이 벋은 길들은 강들은 저절로 가지 쳤을까. 헤쳐모인 돌들은 꽃들은 저절로 둥글었을까. 낭떠러지와 별 따위도 저절로 ..

김석준_김석준이 선정한 좋은 시/ 퀴리온도 : 정숙자

김석준이 선정한 좋은 시(일부) 김석준 환멸과 환상 사이에 언어를 매개시켜 인간학을 승화로 이끄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말에 붙들리고, 시간에 가로막힌다. 까닭은 시의 언어가 늘 진실을 육박하는 곳에서만 존재의 언어를 발화시키기 때문이다. 파열하여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존재의 목소리에 매혹된다. 말하자면 시말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있는 파열음을 고백의 전언으로 승화시킨 영혼의 음성이다. 때론 환멸로 은폐된 이 세계를 진실의 언어로 매개시키면서, 때론 환상으로 둘러쳐진 실재의 기만적 현실성을 폭로하면서, 시인은 자신에게 속한 그 모든 것들 심혼으로 응결시켜 이 세계가 사랑의 전언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예증하게 된다. 퀴리온도 - 정숙자 아직 죽음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이리저리 배치하네. 죽음에 관..

풍화비(風化碑)*/ 정숙자

풍화비風化碑* - 미망인 정숙자 한 획 두 획 마모 된다 그늘마저 깎여 나간다 무딜 만큼 대껴서일까 계절이 휘어서일까 붉거나 푸른 잎도 기둥 밖에서 어른거린다 죽어보지 않았으면서 너무 쉽게 죽고 싶다 말하지 마라 모든 게 시들해졌다 나를 죽인 게 무엇이냐? 내일 빼돌린 죽음 아니냐? 죽어보지 않았으면서 너무 쉽게 죽음을 들먹거리지 마라 진짜 죽음을 만나봐라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어두운 것인가 아픈 것인가 추운 것인가 돌아오고 싶은 것인가 기나긴 것인가 남은 말 못 다한 말 새겨지다가 물러버린다 천년이 발등을 아니 적셔도 돌 아래 아니 누워도 -『시사사』 2014. 3-4월호 *필자의 신조어: 오랜 세월 햇빛과 비바람에 시달려 글자가 닳아 없어진 비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