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85

급류/ 정숙자

급류 정숙자 일단 숨기고 태어난다 빽빽한, 이빨, 그리고 그 이빨들은 모든 칼 날 속에 숨어 있다 칼집 속의 칼과 칼집 없는 칼 붉고 푸른 각종 칼들은 흐핫, 명명되기 이전에 벌써 위치와 용도가 구획된다 장인은 예정 결정한다 떼끼칼 식칼 막칼 등 수많은 길, 구상 배치한다 너는 어떤 칼이고 싶으냐? 묻지 않는다 멋대로 쇠를 고르고 달구고 두드리며 식히고 편다 아주 가끔 칼자루에 보석을 박거나 칼집에까지 당초무늬를 새겨 넣기도 한다 우아한 칼, 수급首級에 빛나(?)는 칼 그러나 이빨이 빠지면 그만인 칼들 그러나! 그러나! 정작 그 칼들은 무서운 칼이 아니다 스스로 변신하는 칼이며 답변하는 칼이며 걸어 다니는 칼 흔하디흔한 웃음소리까지 내는 그 칼들이 (흰 칼이 되기도 하는 그 칼들이) 종횡무진··· 날아다..

죽은 생선의 눈/ 정숙자

죽은 생선의 눈 정숙자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 (차라리) 그런 마음. 꺼내면 안 돼. 왜냐고? 저 머나먼 경계 밖에서 그랬잖아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진정으로) 그런 바람 포개다가 여기 왔잖아 엄마 wormhole을 통해 왔잖아 갖고 싶었던 그 삶 지금이잖아. 여기가 거기잖아 죽어본 적 없으면서 겁 없이 '죽음 희망' 그런 거 품지 말자꾸나. 우리! 경험으로 죽는 건 괜찮지만 경험일 수 없는 죽음 속에서 오늘 이 순간 아주 잊은 채 다시 태어나고 싶을 거잖아? 이게 몇 번째 생일까 생각해봤니? 만약 말이야. 그 비밀이 열린다면, 우린 또 얼마나 큰 후회와 자책/가책에 시달릴까 생각해봤니? 접시에 누운 생선이 나를 바라보면서··· 종을 초월한 자의 언어로 그런 말을 하더군 그로부터 난 생선의 눈을 먹..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 정숙자

얼음은 직선으로 부서진다 정숙자 녹음 ~ 흐름~~~ 이미 나유타 겁의 경험을 내재한 그 그의 순수는 선천적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경험의 소산일 거야. 그의 전신, 혹은 그의 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가급적) 대상을 왜곡지 않아. 볕을 만나면 유유히, 혹한이 스미면 서서히 멈추곤 하지 그러나 만일 꽁꽁 언 그를 누군가 가격한다면 물답게. 얼음답게. 즉각적으로. 온몸으로. 대상을 정황을 상황을 흡수하지. 얼핏 부서져 보이지만 그건 수용이야. 온몸으로 받아들인 대상을 정황을 상황을 분석/파악할 수 있게 되지. 깨어진 조각조각 면면마다 선마다 비의가 눈떠. 왜 아프지 않겠는가 하지만 물은 사유하는 물이므로 통증을 길쌈하여 맑음을 새기곤 하지. 물은 그렇게 얼었다 녹았다 의문을 풀어 나가지. 그렇게 둥근 지구를 얻..

북극형 인간/ 정숙자

북극형 인간 정숙자 육체가 죽었을 때 가장 아까운 건 눈동자다 그 영롱함 그 무구함 그 다정함 이, 무참히 썩거나 재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 아까운 건 뇌가 아닐까 그 직관력 그 기억력 그 분별력 이, 가차 없이 꺾이고 묻히고 만다 (관절들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상냥했던가) 티끌만한 잘못도 없을지라도 육신 한 덩어리 숨지는 찰나. 정지될 수밖에 없는 소기관들. 그런 게 곧 주검인 거지. 비 첫눈 별 의 별 자 리 헤쳐모이는 바람까지도 이런 우리네 무덤 안팎을 위로하려고 철따라 매스게임 벌이는지도 몰라. 사계절 너머 넘어 펼쳐지는 색깔과 율동까지도 북극에 길든 순록들 모두 햇볕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우리가 몸담은 어디라 한들 북극 아닌 곳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정녕 햇빛을, 봄을 기다리지, 죽을 때 ..

완전명사/ 정숙자

완전명사 정숙자 신생아에게 어른은 신이다 태어나자마자 울지 않으면 그는 온전한 인간으로의 가능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어른은 그 손 지키기 위해 두 발목 거꾸로 모아 들고 볼기를 친다. 울어라, 울어라, 울어라, 소리쳐 울지 않으면 안 된다 살려거든 울어라 아기가 가까스로 울음을 터뜨린다 안도한다 겨우 될까? 인간이? 그리고 신은 수시로 확인한다 그에게 주어진 길 다 겪을 때까지··· 언제 울었는지, 다시 울 수 있는지, 온전한 인간으로의 발걸음이 아직도 그대로인지. (이제는 볼기가 아니다) 마음을, 정신을, 경계를 뒤흔들어보기도 한다. 어쨌든 언제든 울 수 있는 심장이 남아있어야만 (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인간에서 벗어난다. 삶의 보증서, 고통 뒤에 직인이 찍히기를 기다린다 신은 안다 그 체읍..

차원 이동/ 정숙자

차원 이동 -미망인 정숙자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지하철 9호선을 타려면 깊숙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걸 타고 1/3쯤 하강 중이었다. 그때, 저 아래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사나이가 보였다. 저벅저벅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계단은 유유히 내려가고 사나이는 계속 (진전 없이) 올라서고 있었다. 곧 부딪칠 텐데, 바로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지만··· ··· ··· 역행? 왜? 아아, 이곳에 서툰 좀비였구나 어쩐지 좀 뼈가 없어 보인다 싶더니만! 나는 좀비를 다른 에스컬레이터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이틀 후 좀비가 다시 내 의식을 열고 들어왔다 뭐지? 왜 안 잊혀지지? 아아아, 날 만나려고 경계를 넘어온 남편··· 이··· 었··· 는··· ..

극지 행(行)/ 정숙자

《문화일보》2018.11.7. 38면 1단 극지 行 정숙자 한층 더 고독해 진다, 자라고 자라고 자라, 훌쩍 자라 오른 나무는 그 우듬지가 신조차 사뭇 쓸쓸한 허공에 걸린다 산 채로 선 채로, 홀로 그러나 결국 그이는 한층 더 짙 푸른 화석이 된다 -『계간 파란』 2018. 봄-여름호 ----------------------- * 시집 『공검 & 굴원』(1부/ p. 19)에서/ 2022. 5. 16.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박설희_상상공화국 그리고 상생공화국(발췌)/ 삶과 4 : 정숙자

삶과 4 정숙자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거울 앞에 선 4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4가 보이지 않으므로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왜 3이 우느냐 그렇구나.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우는 것이었 구나. 4에게 애정 깊은 3만이 자꾸자꾸 눈물 흘리는 까닭이 바로 그런 내막이었구나. 4가 제 삶과 제 얼굴이 그리울 때마다 똑같 은 이유를, 사랑하는 3에게 전달 , 대신 울고야 마는 것이었구 나. 양치질하다가 , 거품 헹구다가 거울을 보며 쏟는 울음도 그 거울 속에서 양치 중인 3..

신상조_익숙하거나 따분한(발췌)/ 삶과 4 : 정숙자

삶과 4 정숙자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거울 앞에 선 4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4가 보이지 않으므로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왜 3이 우느냐 그렇구나,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우는 것이었 구나. 4에게 애정 깊은 3만이 자꾸자꾸 눈물 흘리는 까닭이 바로 그런 내막이었구나. 4가 제 삶과 제 얼굴이 그리울 때마다 똑같 은 이유를, 사랑하는 3에게 전달 , 대신 울고야 마는 것이었구 나. 양치질하다가 , 거품 헹구다가 거울을 보며 쏟는 울음도 그 거울 속에서 양치 중인 3..

하린_지난 계절에 읽은 좋은 시(발췌)/ 삶과 4 : 정숙자

삶과 4 정숙자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거울 앞에 선 4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4가 보이지 않으므로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왜 3이 우느냐 그렇구나.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우는 것이었 구나. 4에게 애정 깊은 3만이 자꾸자꾸 눈물 흘리는 까닭이 바로 그런 내막이었구나. 4가 제 삶과 제 얼굴이 그리울 때마다 똑같 은 이유를, 사랑하는 3에게 전달 , 대신 울고야 마는 것이었구 나. 양치질하다가 , 거품 헹구다가 거울을 보며 쏟는 울음도 그 거울 속에서 양치 중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