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허무를 보았으므로/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5. 12. 30. 01:19

 

    허무를 보았으므로

 

    정숙자

 

 

  하늘은,

  딱히 누구를 지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십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각도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비었지만 새로운 점 하나 찍지도 않고

  그것이 그것인 얼룩만 뭉쳤다 푼다

 

  그 하늘 가장자리서

  그 하늘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그런데 왜

  영문도 모른 채

  뒤집어지고 꺾이고 휘말리고 찔리지 않는 날 없는 것일까

 

  깎아지른 각오 한 줄 없이 어떻게

  남은 생 건너갈 수 있으랴

 

  내일까지만 밟히고

  아니 한 사흘만 더 짓밟히고

  강철커튼 한 벌 만들어 입어야겠다

  현관에도 입히고 지붕에도 입히고 창문에도 입히고

  심지어 침대와 천장에도 입혀두리라

  그 투명강철커튼은 (바위가 닳도록) 수비지향의 의상임을

  하늘 깊숙이 일러두리라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고작 강철커튼이나 구상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결론적으로!

 

  꽃들은 참 열심히 핀다

  누구를 위해 그런 게 아닐지라도

  그들··· 정신들··· 꼭 우리를 향해 뛴 것만 같다

  요즘 부쩍 줄어든 위안과 행복을 얻어가지며  

 

  (아, 꽃봉오리도 강철을 쥔 것이었구나)

 

  나 또한 꽃술 올리면 누군가에게 달빛이 되지 않을까?

  (저 흰 꽃들 틈에 숨은 꽃 붉은 꽃 틈에)

    - 『문학과의식』 2015-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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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공검 & 굴원』(2부/ p. 66-67)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