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를 보았으므로
정숙자
하늘은,
딱히 누구를 지목하는 것 같지도 않다
십년 전이나 오늘이나 달라진 각도도 보이지 않는다
텅 비었지만 새로운 점 하나 찍지도 않고
그것이 그것인 얼룩만 뭉쳤다 푼다
그 하늘 가장자리서
그 하늘 바라보며 사는 우리는
그런데 왜
영문도 모른 채
뒤집어지고 꺾이고 휘말리고 찔리지 않는 날 없는 것일까
깎아지른 각오 한 줄 없이 어떻게
남은 생 건너갈 수 있으랴
내일까지만 밟히고
아니 한 사흘만 더 짓밟히고
강철커튼 한 벌 만들어 입어야겠다
현관에도 입히고 지붕에도 입히고 창문에도 입히고
심지어 침대와 천장에도 입혀두리라
그 투명강철커튼은 (바위가 닳도록) 수비지향의 의상임을
하늘 깊숙이 일러두리라
공격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고작 강철커튼이나 구상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결론적으로!
꽃들은 참 열심히 핀다
누구를 위해 그런 게 아닐지라도
그들··· 정신들··· 꼭 우리를 향해 뛴 것만 같다
요즘 부쩍 줄어든 위안과 행복을 얻어가지며
(아, 꽃봉오리도 강철을 쥔 것이었구나)
나 또한 꽃술 올리면 누군가에게 달빛이 되지 않을까?
(저 흰 꽃들 틈에 숨은 꽃 붉은 꽃 틈에)
- 『문학과의식』 2015-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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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공검 & 굴원』(2부/ p. 66-67)에서/ 2022. 5. 16. <미네르바>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외, 산문집 『행복음자리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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