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85

화살과 북/ 정숙자

화살과 북 정숙자 가슴에 팔다리에 앞길에 정수리에··· 그렇다면 육체란 어디선가 누군가 때때로 겨냥하는 과녁이란 말인가 초점, 그것은 육체보다 더 푸른 정신 혹은 파장일 수도 있지 난 가끔 통증을 느꼈어 찢긴 혈류가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며칠이고 잠 못 들고 피 대신 눈물을··· 지혈시킨 날들 너머로, 내 두뇌를 관통했던 화살··· 촉··· 들··· 날아드는 소리가 메아리치는군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사람은 그 상처를 움켜쥐고 맨 처음 바라본 이를 사랑하게 된다지? 나는 화살에 뚫릴 때마다 그이를 봤어. 그 는 친절했어. 번번이 위안뿐 아니라 황홀에까지도 이르게 했지. 아무리 뾰족한 화살도 긴 화살도 맹독을 바른 화살일지라도, 조용히 빼내 주었어 그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조금씩― 조금씩― 면역력도 ..

녹청/ 정숙자

녹청 정숙자 눈물은 언제 소리를 떨어뜨렸나 눈물은 어디서부터 소리를 분리시켰나 소리를 배제한 눈물··· 그는 진화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를 온전한 '울음'이라 할 수 있을까 소리가 소거된 눈물을 일러 '울었다' 한다면 (그건) 어긋난 컷 아닐까? '눈물이 났다'고까지만 그려야 옳지 않을까? 진정 울음이란 가슴 미어지는 소리를 동반한 피의 외출인 것이다 나이 들면서 머리로 가슴을 다독이면서 격리시키거나 억눌러 버릇한 울 音~ 신생아 또는 어린이들이 터트리는 울음··· 은, 그 얼마나 충실하고도 산뜻한 색상인지! 응시에 응시를 거듭한 내 울음은 단단한 배와 가슴을 뜯어 먹혀도 (다만) (홀로) 눈물 지필 뿐 허다히는 그 눈물마저도 없이 울게 되는 것이다 - 『신생』 2018-봄호 ------------..

캐릭터 대 캐릭터/ 정숙자

캐릭터 대 캐릭터 정숙자 다른 해변에 도착해버리고 만다 하루는 물론 일 년, 1분, 일생까지도 아무리 갈고 닦고 쌓으려 해도 시간은 봉인된 채 제 갈 곳으로만 저벅저벅 흐른다 운명을 쥔 그 어깨 보고 나서는 출구 없는 광야가 가로놓여도 궁금한 것조차 없다 성자들 그들이 집필하지 않은 이유가 어렴풋 드러난다 * * 까도 까도··· 알맹이가 없다고 껍질뿐이라고들 투덜대지만 洋, 파! 그 행성의 원주율과 깨끗한 위도가 요즈막엔 얼마나 든든한지 고마운지. 울퉁불퉁하지 않고 글썽글썽하지도 않고 지구를 쏙 뺀 둥긂과 흙색의 겉껍질과 칼날 없는 칼자루 빼어들고 햇빛 수호하는 이파리들과 * * 파도 파도··· 흙뿐이라고 대지를 탓한 적 있었던가? 지층, 누가 그에게 감히 까도 까도 껍질이라고 '속았다'고 힐난할 수 있..

거기 (정면으로) 서 있는 자/ 정숙자

거기 (정면으로) 서 있는 자 정숙자 도플갱어와 마주치면 죽는다, 는 썰이 횡행한다 하지만 도플갱어를 어디서 만날 수 있나 때론 그를 보고 싶었고 딴은 맞닥뜨릴까 봐 무섭기도 했고 또 때로는 그를 만났는데도 내가 (혹은) 서로 못 알아보고 넘어간 건 아닐까, 호흡을 가다듬기도 했다. 그건 어느 신비주의자가 내건 그림이 아닐까 그런 허구가 온전한 줄기로서 이토록 세상에 너울거릴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제 그가 어디 사는지··· 어느 때 마주치게 되는지··· 그와 정식으로 마주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까지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심증도 어렴풋 만져진다. 출구 없는 자신을 만났을 때, 거기 (정면으로) 서 있는 자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바라보는 자기 자신의 눈 한순간 맞부딪쳐 버리는 자기 자신의 극한의 ..

굴원/ 정숙자

굴원 정숙자 책상 모서리 가만히 들여다보다 맑은 이름들 떠올려보다 나 또한 더할 수 없이 맑아지는 순간이 오면 눈물 중에서도 가장 맑은 눈물이 돈다 슬픈 눈물 억울한 눈물 육체가 시킨 눈물···이 아닌 깨끗하고 조용한 먼 곳의 눈물 생애에 그런 눈물 몇 번이나 닿을 수 있나 그토록 맑은 눈물 언제 다시 닦을 수 있나 이슬 눈, 새벽에 맺히는 이유 알 것도 같다. 어두운 골짜기 돌아보다가, 드높고 푸른 절벽 지켜보다가 하늘도 그만 깊이깊이 맑아지고 말았던 거지. 제 안쪽 빗장도 모르는 사이 그 훤한 이슬-들 주르륵 쏟고 말았던 거지. 매일매일 매일 밤, 그리도 자주 맑아지는 바탕이라 하늘이었나? 어쩌다 한 번 잠잠한 저잣거리 이곳이 아닌··· 삼십삼천 사뿐히 질러온 바람. ···나는 아마도 먼 먼 어느 산..

결국, 나도 나무가 되었다/ 정숙자

결국, 나도 나무가 되었다 정숙자 길은 으레 갈라진다 갈라지는 길목은 미래로의 지시이리라 걷다보면 갈라지고 또 한참 가다 보면 예외 없이 갈라지는 길 돌아보되 슬퍼할 필요는 없다 후회 역시나 금물 역행할 이유는 더구나 없고, 한 가지가 둘로 갈라지면서··· 거기서 자란 한 가지가 또 둘로 갈라지면서··· 나무는 그렇게 본래의 하나로는 돌아오지 못하면서··· 일 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것은 바람의 일) 주어진 때를 걸어갈 뿐인 것이다. 그래도 길은 어딘가로 훌쩍 떠난 게 아니다. 제 척추를 적셔 내린 뿌리에 기둥에··· 새 잎과 가지에 간직하면서··· 나무는 그렇게 나름 의 전형이 되어가고, 맘먹지 않았더라도 뜻밖의 날은 결국 그렇게 오고야 말고, 그리고 그 갈라짐 갈라섬은 새로운 Yes의 'Y' 성숙..

액땜/ 정숙자

액땜 정숙자 죽은 자는 울지 못한다 아니다 죽은 자는 울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 마당에서) 죽은 자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 좀 더 푸른빛 내뿜어야 할 벙어리이기 때문이다. 몇 곱은 더 실다운 삶을 울어야 할 피리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목을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접목할 수도 분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언어는 석상의 눈물에 불과하지만 석상의 눈물은 드넓은 깃발 흔드는 팔과 그 깃대 아래 모인 발들의 쾌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뛸 수도 없는 죽은 자들 날 수도 없는 죽은 자들 길 수도 없는 죽은 자들 전철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빈 병, 아무래도 저 병은 무진장 신났나보다. 바다 하늘 들판이 꼭 바다 하늘 들판이어야 할 까닭이 뭐냐 마구 구른다. 킬킬킬킬킬 깨진 얼굴 비친다. 난생처음 자유..

데카르트의 남겨둔 생각/ 정숙자

데카르트의 남겨둔 생각 정숙자 아무래도 저 태양이 시시포스의 돌일 거라고 그는 회의했다 창공의 불은, 빛은 그의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덜컥! 흔들렸다 정오까지 밀어 올리면 여지없이 저쪽으로 서쪽으로 굴러 떨어져 바다 깊숙이 잠겨버리지 않는가 하지만, 또 이튿날이면 시시포스는 제 심장과 맞먹는 돌을, 제 심장과 맞바꾼 돌을 정오까지 밀어 올리지 않는가 정녕 빨갛게 새빨갛게~ 그러한 노역 덕분에··· 하도나 맑고 밝고 따뜻한 그의 이마로 인해··· 대지는 오늘도 펄펄 날지 않는가 시시포스 오직 그만이 죽어지지도 않는 목숨을 다만 버릇이 되어버린 그 삶을 이어내고 이겨내고~ 밀어 올리지 않는가 이제 놓아라. 다시는 밀어 올리지 마라. 시시포스여! 그만 넘겨라. 네 심장에 더 이상 끌질하지 마라. 신은 너무 오..

저울추 저울눈/ 정숙자

저울추 저울눈 정숙자 이 겨울은 곧 지나갈 것이다 이보다 더한 혹한이 또 닥칠 것이다 어찌 여겨도 해로울 리 없는 그것은 견딤 그것은 겪음 우리가 만일 뜻밖의 북풍에 휘말린다면 이게 곧 자연이다, 훌쩍거리자 낮아지면 견딜 수 있다. 더 이상 내려설 수 없는 곳에 다다랐을 때 약한 울음을 꺼내면 된다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 허구가 아니라는 것 계란 한 알도 허점이 없다, 삶으로 꽉 차 있다 견디지 않아도 되는 전제란 겪지 않아도 되는 존재란 그런 생애란 어느 하늘에서도 팔지 않는다 뭣 하나 건지지 못할지라도 가라앉히고, 멈추고, 미풍조차 봉인시킨 뒤 '견딤'을 '겪음'으로 바꾸는 사이. 그 속에 새로운 눈/코 날개도 스며들리니. 새가 되는 길이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 얇은 껍데기 속에 견딤과 겪음을 돕는..

즐겨참기/ 정숙자

즐겨참기 정숙자 견딤은 참는다는 것과는 다르다 견딤은 강제된 인내가 아니다 외로운 응전/절제된 적응 모호의 전모를 둘러보는 것이다 꼼꼼히, 세세히, 문제의 핵심이 만져질 때까지, 문제가 스스로 답안을 들고 걸어 나올 때까지, 그 암호가 다음의 문을 비춰줄 때까지 견딤은 최전선에 내리는 총동원령 경계수호의 지시와 반성적 잠복 그것은 가칭 ‘빛의 예약’이며 ‘신에게 바치는 허밍’이라 해두자 난황일수록 더욱 지긋이, 우리가 아무리 웃고 있어도, 우리가 아무리 울고 있어도 그건 웃음이 아니라 울음이 아니라 이라는 걸 저 과묵한 산은 알고 있겠지? 산은 늘 묵직한 가슴으로 복기/속기하므로 우리의 걸음걸이를 우리의 뼛속을··· 모든 나무는 눈이고 모든 바람은 눈이고 모든 구름은 눈썹이므로 바람을 내려 답사하고,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