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시집 · 공검 & 굴원

신상조_익숙하거나 따분한(발췌)/ 삶과 4 :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8. 7. 6. 22:57

 

 

    삶과 4

 

    정숙자

 

 

  죽기는 4가 죽었는데

  울기는 왜 3이 하느냐

 

  마땅히 4가 죽었으므로 4가 슬프고

  울기도 4가 해야 옳지 않은가

  거울 앞에 선 4에게

  마땅히 나타나야 할 4가 보이지 않으므로

  아아 내가 죽었구나, 하고 비로소 울고 싶은데

  엉뚱하게도 제 얼굴을 선명히 바라보는

  눈으로 왜 3이 우느냐

 

  그렇구나, 제 삶과 제 표정을 잃어버려 제 죽음을 깨달은 '4'가

펑펑, 혹은 소리 없이 친구나 아내 자식에게 의탁해 우는 것이었

구나. 4에게 애정 깊은 3만이 자꾸자꾸 눈물 흘리는 까닭이 바로

그런 내막이었구나. 4가 제 삶과 제 얼굴이 그리울 때마다 똑같

은 이유를, 사랑하는 3에게 전달   , 대신 울고야 마는 것이었구

나.

 

  양치질하다가   , 거품 헹구다가 거울을 보며 쏟는 울음도 그

거울 속에서 양치 중인 3이 우는 게 아니라, 그 거울 속(보이지

않는) 4가 3으로 하여금 우는 것이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울어줄 3이 아직 남아 있어

  대신 울어줄 3들이 아직 여기 살아있어

  4도 3도 이따금 젖고 있어

    -전문, 『시인동네』 2018-5월호

 

 

   ▶ 익숙하거나 따분한(발췌)_ 신상조

  정숙자의 「삶과 4」는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대상의 부재와 상실을 노래하는 이 시는, 삶과 죽음, 인간 존재와 유한성이라는 제재의 무게를 소리의 차용이라는 가벼움으로 덜어낸다. 그런데 이 전략이 다소 유감스럽다. (……) 이 시에는 네 개의 응시가 등장한다. 4가 거울을 응시한다.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그러나 3이다. 거울 속의 3은 울고 있다. 울고 있는 3을 4가 응시한다. 아마도 3과 4는 오래도록 한 지붕 아래서 아침과 저녁을 맞았으리라. 4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든 3의 시선과 삶을 상실한 4의 시선을 시인이 응시한다. 이렇듯 네 개의 응시를 동시에 불러내는 글쓰기는 간략한 기호인 숫자로 용이해진다. 이상의 「오감도」에 등장하는 13이 단지 13일 뿐이라면, 시에서의 3과 4는 난해하지 않다. 3은 삶이고 4는 죽음이다./ 「삶과 4」의 글쓰기는 삶과 3, 사의 소리가 일치하는 데서 비롯한다. 실상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는 추상과 관념을 터부시하는 문학에서 금기어에 가깝다. 「삶과 4」는 금기어를 대신할 숫자의 소리로써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죽은 사람과의 해후이기도 함을 역설한다. 해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죽은 이에 대한 산 자의 간절한 그리움과 애도의 눈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지탱되는 우리의 삶을 숫자의 소리를 발판삼아 증명한다. 나아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가, '삶의 죽음'에 직면한 4를 대신해서 아파하는 거라고, 남아 있는 자들의 울음이 조금은 더 이어져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다만 3과 4라는 소리의 환기성이 우리의 삶과 친숙한 이 슬픔을 낯설게 하거나 절실함의 깊이까지 더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소리의 유사성이라는 전략은 너무 단순해서, 기표가 기의를 따돌리는 식의 진정한 긴장이 없다. '신음소리나 탄식으로도  전할 수 없는 슬픔'을 의도하는 시의 경우, 언어유희는 "보이지 않아서 더 명확한" 의미를 위해서 사용될 필요가 있다. 소리가 소리를 간섭하며 시적 정서를 점층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여운, 의미의 '완성'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여백이 아쉽다.

 

  * 블로그 註: 시집 『공검 & 굴원』에서는 「삶과 4」에 부제 '미망인'을 달았음

  

  -------------

  *『시인동네』 2018-7월호 <지극히 편파적인 월평> 에서

  * 신상조/ 2011년 《중앙일보》로 평론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