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체적/ 최해돈 겨울의 체적 최해돈 사각형 안에 있었다 늘 제자리였다 느낌이 있는 대로 색깔이 있는 대로 차분한 겨울은 먼지가 날아도 나뭇가지가 휘어져도 혼자의 겨울은 사람을 기다렸다 밑변이 있고 넓이가 있고 높이가 있었다 겨울은 늘 겨울이어서 검정은 어둠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갔다. 빨..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5.15
사람의 바다/ 이경 사람의 바다 이경 어떤 돈을 맡아보면 확 비린내가 난다 비 오는 날 우산도 사치가 되는 시장 바닥에서 썩어 나가는 고등어 내장 긁어낸 손으로 덥석 받아쥔 천 원 짜리 날비에 젖고 갯비린내에 젖고 콧물 눈물 땀에 젖은 그런 돈이 있다 등록금 주려고 찬물에 씻어도 뜨거운 불에 다려도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5.13
청춘/ 최문자 청춘 최문자 파랗게 쓰지 못해도 나는 늘 안녕하다 안녕 직전까지 달콤하게 여전히 눈과 귀가 돋아나고 누 군가를 오래오래 사랑한 시인으로 안녕하다 이것 저것 다 지나간 재투성이 언어도 안녕하다 삼각지에서 6호선 갈아타고 고대병원 가는 길 옆자리 청년은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4.05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서안나 나는 이렇게 물을 고쳐 쓴다 서안나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두 손을 씻으면 위로할 수 없는 손이 자란다 고통은 유일하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젖은 배를 끌고 황금의 도시로 가는 자들아 나의 인간과 당신의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울면 지는 것이..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4.04
도플갱어/ 강서완 도플갱어 강서완 달빛 아래 잠든 손 산맥을 접고 호수를 타고 온 바람이 만돌린을 스친다 동백꽃이 툭툭 떨어진다 기염을 토하던 초록색도 엎어졌다 한밤엔 늑 대가 왔다 절벽 끝에서 하늘도 목을 늘였다 허공이 끈적거린다 바람의 근간이 휘발된다 목이 긴 물병 속으로 달빛이 휘어진다..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4.01
조응(照應)의 푸른 방향성/ 고은산 조응(照應)의 푸른 방향성 고은산 이파리들의 청잣빛 다툼을 관망하는 참새 한 마리, 혀의 길이만큼 짧게 재잘재잘 청명을 씹고 있다 청명의 강도가 클 때 지상에 피는 꽃잎 같은 소동의 계절은 잽싸게 익어간다 먼 남녘 밭이랑 사이 부지런히 흐르는 젖산의 농축이 새싹 같다 새싹의 노..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2.08
벽/ 신철규 벽 신철규 그때부터 우리는 모두 벽이 되었다. 너랑 얘기하면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아. 하루 종일 벽을 따라 걷는 독방의 수인을 생각하는 밤. 다족류들은 벽을 만나기 전까지 방향을 틀지 않는다. 저 수많은 발이 여는 원탁회의는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당신은 벽에 대고 사랑해, 라고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2.03
삵 또는 삶/ 이면우 삵 또는 삶 이면우 높은 나무 등걸, 솟은 바위 너머에서 이쪽 목줄 향해 몸을 날린다 나는 미리 수건을 목에 감아뒀다 놈의 송곳 이빨이 목수건 깊이 파고든 그때, 한 손은 번개같이 풀고 남은 손이 놈의 목줄을 움켜쥔다 목뼈를 으스러뜨리듯, 간절히, 간절히 기원하듯 두 손 뭉뚱그려 꽉 ..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2.03
유년의 강/ 박무웅 유년의 강 박무웅 어릴 적 마을 앞을 흐르던 강은 아주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숨기 좋아하는 것이 물고기들이라 그 어두운 물속으로 모두 숨고 흐린 날이면 비릿한 냄새만 마을로 살랑살랑 헤엄쳐 들어왔습니다. 강은 어찌나 깜깜한지 육촌형님이 숨은 것도 찾지 못했고 장..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2.03
물의 증인/ 서동욱 물의 증인 서동욱 피부가 잠수복이 아니라면 몸은 깻묵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정치가여 고무공을 꼭 잠가놓으라고 말해봐라 그러나 장래의 모든 세대는 바닷가에서 시험관에 조심스럽게 물을 담을 것이다 바다는 고백을 않고는 버티지 못한다 바다의 성분 바다의 성분 거대한 종처럼 날.. 잡지에서 읽은 시 201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