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유비무환/ 곽문연

유비무환 관문연/ 시인 태풍경보가 내렸다. 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에 설상가상으로 태풍까지 겹쳐왔다. 시시각각 전해오는 기상청 예보는 역대급 태풍이라 한다. 모처럼 한적한 해변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간절히 소원한 나의 기대는 크게 비켜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태풍은 내 방 유리창을 부수고 창밖으로 보이는 단단한 나무들을 할퀴고 쓰러트리며 지나갔다. 나는 읽고 있던 『총균쇠』 책을 바람이 보이는 곳에 올려놓았다. 바람은 산발하여 천지를 휘두르며 지상의 모든 것을 할퀴고 쓰러트린다. 거실에 앉아 묵념에 든 나는 서서히 배가 아프고 침이 말았다. 시시각각 드세지는 바람 앞에 인간은 하나의 나약한 등불. 저 거대한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총균쇠 제2장 "세균이 준 사악한 ..

에세이 한 편 2021.01.24

우리는 모두 소나무가 될 수 있다/ 정숙자

우리는 모두 소나무가 될 수 있다 정숙자/ 시인 돌, 깨진 날의 모서리// 너무 동그란 것은 가짜다. 너무 매끈한 것은 가짜다. 산책로에서 그런 돌이 눈에 띄면 다가가 건드려본다. 그건 신의 솜씨가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쓰다가 버린-버려진 것이다. 너무 다듬은 선, 너무 다듬은 구球. 순수는 그럴 리 없다. 천진은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짧은 하룬들 시달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해변의 돌멩이라 할지라도 고유한 제 색깔 제 각도 제 모서리를 지닌 채 세월을 건너온 육체들이다. 깨졌던 첫날의 모서리야 얼마나 날카로웠겠는가, 아팠겠는가, 그 푸르름이야 또 얼마나 싱싱했겠는가. 하지만 그날의 모서리가 다시 일어설 힘이었던 것이다. 영초동령靈草冬榮// ‘신령스런 풀은 겨울에 영화롭다’는 뜻의 이 사자성어는 ..

에세이 한 편 2021.01.23

이토록 아름다운 낮은 자 권정생/ 박미경

이토록 아름다운 낮은 자 권정생 박미경/ 수필가 가수 나훈아가 노래했다. "테스 형 천국은 있던가요, 소크라테스 형 먼저 가 본 그곳은 어떤가요." 미세먼지의 공포로 하늘을 올려보지 못한 채 살다가 코로나19 덕분으로 투명해진 푸른빛 가을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훈아 투로 묻고 싶어지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권정생 선생님, 천국은 있던가요.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은 옳던가요." 병마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되었던 삶을 '오물 덩이처럼 딩굴면서' 살았던 혹독했던 지상의 삶을 털고 하늘로 떠난 지 13년. 그곳에서 행복하실까 궁금해진다. 글과 인격, 삶과 사상, 그리고 유언까지 일치한 거의 유일한 사람, 권정생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에세이 한 편 2021.01.02

문명기행, 밀림(密林) 속의 마야(발췌)/ 이관용

밀림密林의 마야_잉카문명의 흔적痕跡 이관용/ 시인 마추픽추(Machu Pucchu)는 잉카문명의 마지막 숨겨진 보석인 동시에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한 현재도 유일한 석조건물만 지어진 공중도시이다. 높이 21,763FT(2,400m), 주민 1,000여 여 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넓이와 공간이라 한다. 물론 3곳의 신전(태양신전, 콘도라 신전, 푸마 신전) 을 제외하고 주거 공간과 관리 시설들의 규모를 기준해서다. 지금도 돌로 만든 수로에서 맑고 충분한 물이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제물(일설로 처녀들)을 신이 가까이 바라볼 수 있게 높은 산정을 선택했다고 한다. 1911년 예일(Yale)대학 고고학 교수 하이럼 빙해(Hiram Bingham)탐사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

에세이 한 편 2020.12.16

동전 구멍으로 내다본 세상/ 유혜자

동전 구멍으로 내다본 세상 유혜자/ 수필가 차르륵 차르륵, 숙모님이 지나갈 적마다 허리춤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큰 집안의 며느리였던 숙모님이 할머니에게서 살림의 주도권을 인계받아 열쇠 꾸러미를 차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곡식과 연장을 넣어 두는 광 열쇠, 몇 가마니들이의 뒤주, 그밖에 장롱이며 벽장 등의 것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니셨다. 어느 날 그 열쇠 꾸러미에서 시꺼멓고 구멍이 뚫린 동그란 쇠붙이를 발견했다. 녹이 슬고 닳아서 글씨는 분명치 않았지만 가운데에 사각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이 조선왕조 때 쓰던 돈인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첩첩산골에서 태어나 50리나 되는 장 구경 한 번도 못 하고 시집 온 새댁이 어려서부터 돈이라는 걸 꾸러미로 만들어 숨겨 온 줄은 친정에서나..

에세이 한 편 2020.11.15

시는 아직 살아있다는 구조 요청의 신호/ 현택훈

시는 아직 살아있다는 구조 요청의 신호 현택훈/ 시인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시인 기형도의 시 「비가2 -붉은 달」의 부분이다. 기형도는 마치 유언처럼 생존자들에게 살아 있으라, 라는 구조 요청 같은 전언을 남겼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는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살아서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증명해달라는 절규다. 코로나19 시대에 누구든 감염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무증상이라는 말도 무섭게 들렸다. 무증상자에 의해 감염될 수 있다는 건 자신도 모르게 감염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전염병이 곧 부조리인 것. 우리는 거의 모두 부조리에 감염되어 있다. 불의..

에세이 한 편 2020.11.10

'현존'이라는 거북이/ 김산

'현존'이라는 거북이 김산 거북이와 같이 지낸 지 만 28개월이 넘었다. 아프리카 출신인 이 녀석의 이름은 '현존'이다. 그야말로 지금의 나이고 나를 나답게 하는 나의 친구이자 애인이며 스승인 나의 '현존'은 큰 병이 걸리지 않으면 80년은 족히 산다고 알려져 있다. 중지 손가락만 할 때부터 내 곁에 있던 거북이는 이제는 내 손바닥으로는 덮지 못할 만큼 자라 조금 더 있으면 내 손이 두 뼘 길이보다 더 자랄 것이다. 치커리와 애호박과 청경채 등의 채식만 하는 이 친구는 하루에 20시간은 족히 잠을 자는 잠꾸러기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크게 아프거나 식사를 거르지 않아서 대견한 이 거북이는 이제는 배가 고프면 사육장 우리문을 앞발로 두드리는 건강한 아성체가 되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신진대사..

에세이 한 편 2020.10.08

그믐달/ 나도향

그믐달 나도향(1902-1926, 24세)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만.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만,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에세이 한 편 2020.09.24

나의 시(詩)는 운명과 함께 나의 생(生)은 기적과 함께/ 정숙자

나의 시詩는 운명과 함께 나의 생生은 기적과 함께 정숙자 prologue 1988년 12월에 등단했으니 내 문랍文臘은 올해로 32년이 되었나 보다. ‘나의 생生’을 쓰기에는 좀 이르지 않나 싶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그리 짧은 세월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더 파고들자면 세월이 아니라, 그 세월에 짱짱히 값할 만한 작품을 빚어냈느냐, 하는 생각이 실로 큰 문제로 다가온다. 무엇으로서 나의 생을 말할 것이며, 과연 무엇으로서 나의 시를 피력할 것인가. 그런데 저 멀리서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편집자의 눈은 빗나가지 않는다. 청탁이란 가능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 들었던 정의가 주눅 든 내 어깨에 손을 얹어주었다. 1. 운명의 문 대개 ‘운명’이라는 말에는 행복보다는 불운의 이미지가 내재 되기 마..

에세이 한 편 2020.09.18

불교를 만난 유발 하라리/ 신종찬

불교를 만난 유발 하라리 신종찬/ 신동아의원 원장 평생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평정이다. 바닷가에서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나쁜 파도를 밀어내어 자신에게 오지 못하게 애쓰는 일이다. 늘 이렇게 애쓰면 마침내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가에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이는 세계적인 석학 유발 하라리의 명저 『사피엔스』 중, 불교의 명상 후기의 한 부분이다. 그의 또 다른 명저 『호모 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도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텔아바브대학 교수인 그는,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한 데다 자연과학에도 해박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들을 생산하고 있다. 동서양에 대한 편견 없는 견해와 미래에 펼쳐질 첨단과학기술 사회에 대한 그의 예측은 많..

에세이 한 편 2020.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