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존재의 순간들/ 이태동

존재의 순간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절망할 때가 많다. 물론 나는 이것을 나이테가 쌓이면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체념하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이 어른이 된 후 내 삶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몇몇 아름다운 일들과 함께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인식하고 향수에 젖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기쁨을 발견한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빛바랜 사진 속의 할머니가 어린 나를 데리고 진외가로 갔던 일이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것은 그때의 ..

에세이 한 편 2021.04.28

길나무의 털목도리/ 윤효

길나무의 털목도리 윤효/ 시인, 전 서울 오산중학교 교장 지난 겨울동네 산책길에서 쉽사리 잊히지 않는 풍경을 만났다. 길 따라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알록달록 털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것도 손뜨개로 정성껏 뜬 것이었다. 세수수건만 한 것부터 전신수건만 한 것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형형색색 빛깔 또한 다채로웠다. 꽃이나 나비나 새를 돋을새김 손뜨개로 꾸며 놓은 것들도 여럿이었다. 한겨울 무채색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월동용 수목 해충 포집기였다. 일명 해충 잠복소라고도 하는 이것은 나무에 서식하는 해충들의 유충이 겨울을 나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는 습성을 이용한 설치물이다. 대개는 짚으로 만들어 늦가을에 사람 가슴 높이쯤에 둘러놓는다. 그랬다가 월동이 끝나는 초봄에 떼어 불로 태운다. 살충제를 뿌리..

에세이 한 편 2021.04.24

서정주 시인의 아스라한 에스프리, 그 살가운 정/ 이경철

서정주 시인의 아스라한 에스프리, 그 살가운 정 이경철/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행사를 시작하기 전 의례로 작고 문인에 대한 묵념이 이어진다. 근래 한 행사에서 묵념을 마친 다음 주위의 선배들께 묵념 때 누굴 먼저 떠올리느냐 여쭸더니 대부분 미당 서정주 시인이란다. 왜? 육친 같은, 살가운 정 때문에. 나 역시 그렇다. 고교 시절 미당을 처음 뵈었다. 1974년 가을 경복고등학교 에 초대돼 강평을 마친 미당은 "시를 좋아하고 잘 쓰니, 학생한테 꼭 보여줄 데가 있다"며 인근 보안여관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한동안 함형수하고 같이 살다시피 하며 『시인부락』이란 잡지를 냈지. 근사하게 말이야. 란 간판까지 내걸었는데······"라며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입만 쩝쩝 다시셨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

에세이 한 편 2021.04.21

예술과 정신/ 김아타(사진작가)

예술과 정신 김아타/ 사진작가 작가는 태생적으로 사회성이 부족하다. 정치적인 감각은 더더욱 어둡다. 하지만 그들은 섬세하고 자신의 세계에 치밀하게 작동하고 투쟁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직 작품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투쟁을 빌려 무한 진화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제어하고 반성하게 한다. 문화는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하는 가장 소중하고 화려한 행위이며 문화의 전위대이다. 부디 오해하지 마라. 작가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전사들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생명을 담보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전사들이자 용맹정신하는 수행자들이다. 예술 행위는 수행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수행자의 공간보다 더 지독한 환경에 노출된다. 보시도, 헌금도, 성역..

에세이 한 편 2021.03.05

아기 뱀 한 마리/ 류세진

아기 뱀 한 마리 류세진/ 수필가 온 대지를 태울듯이 달구던 불볕더위도 말복이 지나고 처서가 다가오자 조금 수그러든다. 쨍쨍 내리쬐던 열기가 아침 저녁의 서늘한 바람에 한풀 꺾인 듯하다. 그래, 어떤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할 때는 이 더위가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한데 누가 막으랴. 오고 가는 계절의 변화를. 어제까지 호기롭게 여름을 달구던 매미들이 어느 날 뚝 하고 노래를 멈춘다. 누구 하나 뒤처짐이 없다. 그게 그들의 사는 방법일까. 우리가 미물이라 일컫는 작고 힘없는 저들. 과연 저들은 감정의 기복이 없을까. 그냥 하루아침에 죽어버리는 것일까. 기쁘고 슬픈 아무 감흥도 없이 짜인 순서에 따라 그 시간이 꽉 차면 성충이 되고 죽어라 짝을 부르다 또 그렇게 죽어가는 생명일까..

에세이 한 편 2021.02.26

1998년, 내 일기장 속의 며칠/ 정숙자

1998년, 내 일기장 속의 며칠 정숙자 1998년 1월 13일 미당 선생님 댁 방문하다. 1998년. 2월 28일 모 잡지사의 부탁으로 선생님 댁 다시 방문, 다음 호에 내외분 회혼일을 기념하여 표지 사진 촬영 날짜와 시간을 잡다. 1998년 3월 14일 앞서 약속한 모 잡지사 팀과 선생님 댁을 찾아갔으나, 잡지사 팀의 사정으로 50분 늦게 도착. 그로 인해 끝내 대문이 안 열려 뵙지도 못하고 돌아오다. 1998년 3월 22일 회혼식 자리에 갔다가 선생님의 믹소포비아(Mixophobia) 증세에 큰 충격을 받음. 날 보고 FBI의 스파이라고,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모 잡지사 아무개와 짜고 네년이 나를 잡아가려 해… 네년 뒤에 안기부의 졸개들이 줄줄이 따라오는 게 보인다고, 나를 어느 산속으로 끌고 가..

에세이 한 편 2021.02.11

아버지를 남용한 상속인들/ 조재형

아버지를 남용한 상속인들 조재형/ 시인 영달 씨 어머니는 대지주의 상속녀였다. 오 남매 중 맏이인 영달 씨를 빼고는 그 많은 땅을 지켜오는데 기여도가 별로 없다. 연로한 어머니가 사망할 무렵 허술해진 노친의 총기를 틈타 자식들은 하나둘 어머니의 땅을 빼먹었다. 어떤 자식은 증여라는 명목으로 해 먹고, 또 어떤 놈은 돈 한 푼 안 주고 버젓이 매매라는 명목으로 해 먹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무섭게 사달이 났다. 상속을 정리하던 중 어머니 살림이 생전에 요절난 것이 드러냤다. 결국 골육간에 분쟁으로 비화하였다. 처음에는 형제들끼리 유류분을 찾기 위한 정도의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양측 간에 변호사가 개입하고 급기야 집안의 전면전으로 번졌다. 구순이 넘은 아버지까지 끌어들였다. 한 자식이 아버지를 공동 원고..

에세이 한 편 2021.02.04

시집의 기원 외 1편/ 조재형

시집의 기원 외 1편 조재형/ 시인 시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시인이 된 것은 불운이었다. 내가 아는 시인들은 모두가 고독이라는 이상한 지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개의 반란 바이러스와 의심과 불만의 질병을 몸에 지닌 채 거짓말을 훔치러 진실을 뒤지고 다닌다. 그들은 다들 몸속 깊은 곳에 커다란 슬픔을 감추고 있다. 슬픔보다 더 깊은 강 하나씩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다. 굽이치는 내면의 강에서 범람하는 슬픔을 대신 저장해둘 적절한 집을 찾고 있다. 누군가는 그 공간을 시집이라고 했다. -전문- ------------------------------------- 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 늙어가는 집을 시골에서 찾았다. 오래전 타계한 피상속인 명의로 등재된 집은 망자보다 더 늙..

에세이 한 편 2021.02.03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위하여/ 정숙자

행복지수 UP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위하여 정숙자/ 시인 오늘은 2020년 12월 22일. 현재 15:17분을 지나고 있다. 아침부터, 아니 며칠 전부터 멋진 원고를 쓰기 위해 두뇌를 달궈보지만 여의치 않다. 문단 경력 30여 년에 이런 경험은 처음 일이다. 왜일까? 그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의 여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출입이 통제되는 일상생활의 마비와 그로 인한 경제환경의 위축, 이제 막 청장년기에 진입하는 세대들의 꿈과 욕망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불편/불안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일부 계층을 빼놓고는 하루하루가 편한 잠 이루기마저 힘들 정도다. 필자 역시 자영업에 위협받는 아들이 있어 전국 어머니들의 고통을 함께 짐 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지혜를 동..

에세이 한 편 2021.02.01

전쟁과 문인/ 정재영

전쟁과 문인 정재영/ 시인 코로나(바이러스 생략)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거나 죽어간다. 병이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은 영어에서 ~too ~to 용법처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코로나 사태에도 유익한 일은 있다. 환경공해의 일부 영역을 바이러스가 치유시키고 있다 하니, 맨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만물의 영장을 부끄럽게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살펴보는 기회도 생겼다. 거리두기나 봉쇄라는 말에서 공동체가 가져다주었던 일상의 행복을 절절하게 깨달은 일은 얼마나 귀하고 훌륭한가. 단 죽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타액과 불가분의 직업으로 단순한 마스크가 유일한 산성이며, 피난처요, 요새다. 조금 다행인 것은 한가해져 밀린 일들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총..

에세이 한 편 2021.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