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허(虛)의 미학을 창조하는 일/ 정효구

허虛의 미학을 창조하는 일 정효구/ 문학평론가 · 충북대 교수 홍수 속에서 식수난을 겪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도처에서 언어가 넘쳐나는데도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부박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언어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에는 이미 우리들의 언어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입고 객지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현실을 만들어낸 것일까? 나는 이 지점에서 언어를 발하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살펴본다. 언어란 마음이 만든 산물이자 마음의 연장延長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살펴볼 때, 그곳엔 허심이자 허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허虛의 총량'이 마이너스 지점을 가리키며 위태롭다. '허'란 빈 공간이며, 빈터이며, 빈 세계이다. 무위의 영역이고, 자연성의 길이며, 무상의 시..

에세이 한 편 2021.06.15

죽음에서 살아나온 나사로/ 김구슬

죽음에서 살아나온 나사로 김구슬/ 시인 2020년 1월 2일은 전 세계 T. S. Eliot(1888-1965, 77세) 연구자들에게는 나사로를 기다리듯 오랫동안 기다려온 획기적인 날이었다. 1922년 모더니즘의 도래를 알리는 「황무지The Waste Land」가 출판되자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의 황폐함을 그린 것이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대해 엘리엇은 「황무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앵글로 가톨릭"이라고 천명하며 철저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한 엘리엇의 이 언급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엘리엇은 정말 차갑고 건조한 지성과 객관의 시인이었을까? 「프루프록의 사랑노래The Love Song of J. ..

에세이 한 편 2021.06.04

최교진_마실 가듯이 먼저 간...(발췌)/ 마실 가는 길 : 류지남

마실 가는 길 류지남 마실 가는 길은 동지섣달 밤마실이라야 제격이다 흙처럼 사는 사람들, 지푸라기같이 여린 마음들, 실없이 둥실둥실 이웃집에 정 붙이러 가는 길이다 배고프고 착한 사람들 이럭저럭 저녁 끼니 때우고 마실 나온 별들과 둥글둥글한 얼굴들 빙 둘러앉아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이야기꽃 피워내는 길이다 봄바람 일렁이는 풋가시내들은 풋가시내들끼리 남정네들은 남정네들끼리, 할미들은 또 할미들끼리 희미한 등잔불 아래 화롯불 끼고 아무렇게나 앉아 별 시덥잖은 얘기애도 일부러 배꼽 잡고 나자빠지며 애구, 저런, 쯧쯧 워쩐댜, 추임새 넣어가며 놀다 보면 시름도 설움도 희미한 굴뚝 연기처럼 흩어져 가느니 쟁반 같은 달 떡하니 걸리는 정월 대보름날 다가와서 윷판 신명나게 놀거나 먹기 내기 화투장 돌리다 보면 겨울밤..

에세이 한 편 2021.05.27

양문규_자연으로 가는 길/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 : 나태주

자연으로 가는 길 · 25 양문규 자연으로 가는 길은 주경아독晝耕夜讀, 청경우독晴耕夜讀이다. 올봄은 여느 봄날보다 보름 앞당겨 꽃들을 데려다주었습니다. 3월 초하루, 지난겨울 입었던 내복을 벗자마자 영춘화와 갈마가지나무와 매화가 꽃망울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산수유가 노랗게 봄날을 열었습니다. 작은 연못에는 개구리가 한 무더기 알을 슬어 놓고 밤새 개굴개굴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개나리와 참꽃이 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참꽃은 아주 오래전 해부터 식목일 전후 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3월 중순쯤 절정을 이뤘습니다. 그때 남쪽에서는 벚꽃이 만개했다고 들썩들썩했습니다. 진해 군항제 벚꽃 축제가 매년 4월 1일 열렸던 걸 보면 이 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지요. 나도 모르게 '세상이..

에세이 한 편 2021.05.25

故 김점용 시인 추모글: 이름을 불러본다/ 정진혁

이름을 불러본다 정진혁 "대패는 장대패가 좋다 어미날에 덧날을 끼우고 손은 머리를 감싸듯 가볍게 잡되 오른손은 대패 뒤꽁무니와 구멍 중간을 단단히 잡는다 발에 무게 중심을 두고" 김점용 시인의 「눈물을 깎는 법」 일부이다. 시인을 처음 만나 손을 잡았을 때 손이 두툼했다. 나는 그 두툼한 손이 좋았다. 교수를 하다 목수 일을 배우던 때이다. 두툼한 손은 복 많이 받을 손이라는데 점용 시인 복을 밚이 받았는지? 월미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도로 건너가는 동안 우리는(박홍 시인, 문정영 시인, 김점용 시인, 그리고 나)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대해 이야기한 것 같다. 사회의 모순과 아픔들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점용 시인의 말이 아련하게 슬펐다. 횟집에서 술을 마시고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바닷가에 둥..

에세이 한 편 2021.05.24

음악가의 에피소드와 시/ 배홍배

음악가의 에피소드와 시 배홍배 에피소드) 두 사람의 슈베르트 이야기/ 세상엔 이름이 같아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긴 유명인들이 있다. 독일 드레스덴의 궁정 음악가 프란츠 안톤 슈베르트와 오스트리아 빈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이야기다. 안톤 슈베르트가 1827년에 69세로 세상을 떴고, 겨울 나그네로 유명한 페터 슈베르트는 31세로 1828년 요절했으므로 두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가 같았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다리 하나를 두고 자유 왕래를 하던 터여서 두 음악가와 관련된 오해의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페터 슈베르트가 17세 되던 해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곡을 붙여서 악보를 괴테와 라이프치히의 브라이코프 운트 헤르텔 출판사에 보낸다. 그러나 괴테는 무명의 슈베르트가 쓴 악보를 읽어보지도 ..

에세이 한 편 2021.05.21

항아리부터 깨라/ 강기옥

항아리부터 깨라 강기옥/ 시인, 본지 편집주간 장난이 심한 아이들이 대감집 뒤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담장과 지붕은 물론 장독대의 항아리도 오르내리며 놀이를 즐기는 사이 한 아이가 항아리에 빠졌다. 어른 키만 한 항아리에 올라 숨을 곳을 찾다 그만 미끄러진 것이다. 물이 가득 찬 항아리 안에서 아이는 허우적거렸다. 어른들이 달려오더니 주변의 사다리와 밧줄을 집어던졌으나 아이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그 순간 한 아이가 힘에 부치는 돌덩이를 들고 오더니 이내 항아리를 내리쳤다. 철옹성 같던 항아리가 순식간에 깨지고 속 깊던 물은 바닥으로 쏟아져 담장 옆으로 흘러내렸다. 어른들은 만류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한 사이 돌을 던진 아이는 항아리 속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등을 두드려 ..

에세이 한 편 2021.05.18

책은 나의 꽃/ 서지원

책은 나의 꽃 서지원/ 소설가 어떤 사물을 만들어낸다거나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나의 손 나의 머리로 하나의 예술품이 창조되고, 어떤 생각이 실마리를 잡고 물길을 연다면 그 또한 가슴 벅찬 일이다. 봄날 꽃을 심어보자. 저 하늘의 별만큼 많은 꽃 중에 그 하나를 고르되 얼마나 아름다운 꽃인가는 굳이 따지지 말기로 하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에 우리 인간은 너나없이 취하지만 그 비교 우위에 서겠다는 인간의 심성으로 그 피어날 꽃을 기다리지 말고 그저 꽃 하나를 심어보자. 그냥 생명 하나가 이 후덕한 땅, 따스한 햇살, 비바람과 눈보라의 도움으로 싹이 트고 떡잎이 나고 줄기가 흔들리며 자라나서 끝내는 그 자신의 모습을 우리 인간에게 보여준다는 신비함만으로 감사하고..

에세이 한 편 2021.05.14

오숙, 다섯 개의 내음/ 차유진

中 오숙, 다섯 개의 내음 차유진 쪽 찐 머리에 은비녀를 꽂은 그녀는 고작 스물여섯에 남편을 잃었다. 시린 겨울이면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홀로 새벽을 밝히던 여성이었다. 가끔 연탄 불구멍에 담배를 가져다 불을 붙인 후 뻐끔거리며 쓴웃음을 짓던 그녀는, 나의 할머니다. 꿈에라도 보고픈, 또 다른 내 어머니. # 애틋, 글내음 그녀는 가난 속에서도 글을 쓰고 시를 읽던 꽃 같은 사람이었다. 릴케가 말했던가, 쓰지 않으면 살아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고. 왜 할머니가 그토록 글을 쓰셨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듯도 하다. 이제야 알아서 미안하고.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의 향을 사랑하던 사춘기 시절, 실컷 외롭고 싶거나,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슬픔 같은 것들을 끄집어내고 싶어도 혼자만의 공간이..

에세이 한 편 2021.04.30

만홧가게 아저씨/ 지연희

만홧가게 아저씨 지연희/ 수필가,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같은 아침으로 시작하여 같은 밤이라는 이름으로 잇는 시간의 연속 속에서 하루와 한 달이 그리고 한 해가 저물고 다시 열리고 있다. 그 같은 반복된 의미들의 거듭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나이를 계산하고 세월의 빠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시간의 덧없음을 아쉬워하며 . 그럼에도 새해 첫날은 바로 그 아쉬움을 치유하는 가슴 부푼 희망을 설계하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밤 자정에서 영시로 넘어가는 시각과 시각 사이 보신각 타종의 그 순간으로부터의 새해의 의미는 그렇게 규정짓게 된다. 그냥 어떤 변화를 꿈꾸고 어떤 시대로 가슴을 부풀린다. 거듭되는 내 일상 또한 내일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찾아올 것만 같은 희망으로 연..

에세이 한 편 2021.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