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최교진_마실 가듯이 먼저 간...(발췌)/ 마실 가는 길 : 류지남

검지 정숙자 2021. 5. 27. 01:20

 

    마실 가는 길

 

    류지남

 

 

  마실 가는 길은 동지섣달 밤마실이라야 제격이다

  흙처럼 사는 사람들, 지푸라기같이 여린 마음들,

  실없이 둥실둥실 이웃집에 정 붙이러 가는 길이다

 

  배고프고 착한 사람들 이럭저럭 저녁 끼니 때우고

  마실 나온 별들과 둥글둥글한 얼굴들 빙 둘러앉아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이야기꽃 피워내는 길이다

 

  봄바람 일렁이는 풋가시내들은 풋가시내들끼리

  남정네들은 남정네들끼리, 할미들은 또 할미들끼리

  희미한 등잔불 아래 화롯불 끼고 아무렇게나 앉아

 

  별 시덥잖은 얘기애도 일부러 배꼽 잡고 나자빠지며

  애구, 저런, 쯧쯧 워쩐댜, 추임새 넣어가며 놀다 보면

  시름도 설움도 희미한 굴뚝 연기처럼 흩어져 가느니

 

  쟁반 같은 달 떡하니 걸리는 정월 대보름날 다가와서

  윷판 신명나게 놀거나 먹기 내기 화투장 돌리다 보면

  겨울밤이란 언제나 토끼 꼬리처럼 턱없이 짧기만 한데

 

  아쉬운 발길, 휘영청 밝은 달빛 호위받으며 돌아와

  서러운 살붙이들 곁에 시린 몸 살그머니 뉘고 나면

  생의 하늘엔 모락모락 샛별 다시 돋아나기도 하리니

     -전문-

 

  마실 가듯이 먼저 간 따뜻한 사람, 류지남(발췌) _최교진

  지난 1월 17일 오후 상주 사는 조영옥 선생님 전화를 받았다. 새해 인사 전화려니 하고 무심히 받았는데 목소리가 다급하다.

  "류지남 선생이 죽었다는데 사실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방금 작가회의에서 연락이 왔어요. 믿어지지 않아서, 확인 좀 해봐요."

  휴대폰을 열어보니 몇 군데서 그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 와 있다. 고향 마을 친구와 함께 마곡사 태화산 산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서 구급 헬기로 천안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숨을 거뒀단다. 지남이가? 왜? 어쩌다가?  

   (······

  류지남 선생이 갑자기 떠났다. 모두 믿을 수 없는 일에 당황하고 슬퍼하는 일조차 조심스러웠다. 18일 오후에 그의 고향 신풍장례식장에서 추모행사를 했다. 평소 그가 일한 열 몇 개 단체가 함께 하는데 코로나19 상황에도 자리를 가득 채웠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알만한 얼굴이지만 차마 서로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 나에게도 추도사 한마디 하라고 하는데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사양했다.

  나는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지남이를 안아준 일이 있나? 진심으로 후배인 그를 칭찬하고 격려한 일은 있나? 왜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해서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나? 시집『마실 가는 길』을 따뜻하게 읽고 나서 왜 고마운 감상평 한마디 하지 않았나? 명예퇴직하고 난 뒤 무슨 계획이 있는지 왜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나? 잘못한 일만 끝없이 생각난다. 한없이 미안하다. 도저히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p. 시 194-195/ 론 190 (······) 193-194]

 

   # 류지남/ 1991년『삶의문학』으로 등단, 시집『내 몸의 봄』『밥꽃』『마실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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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 2021-여름(62)호 <시에 추모 에세이>에서   

   * 최교진/ 충남 보령 출생, 1985년『삶의문학』으로 등단, 교육에세이『사랑이 뛰노는 학교를 꿈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