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죽음에서 살아나온 나사로/ 김구슬

검지 정숙자 2021. 6. 4. 03:20

 

    죽음에서 살아나온 나사로

 

    김구슬/ 시인

 

 

  2020년 1월 2일은 전 세계 T. S. Eliot(1888-1965, 77세) 연구자들에게는 나사로를 기다리듯 오랫동안 기다려온 획기적인 날이었다. 1922년 모더니즘의 도래를 알리는 「황무지The Waste Land」가 출판되자 이것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의 황폐함을 그린 것이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대해 엘리엇은 「황무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문학에서는 고전주의자, 정치에서는 왕당파, 종교에서는 앵글로 가톨릭"이라고 천명하며 철저한 보수주의자를 자처한 엘리엇의 이 언급에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엘리엇은 정말 차갑고 건조한 지성과 객관의 시인이었을까?

  「프루프록의 사랑노래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에서 화자가 "나는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기 위해 돌아온, 죽은 자들로부터 온 나사로이다"(요한복음 11장 1-44)라고 했듯이, 엘리엇 역시 에밀리 헤일Emily Hale에게 보낸 1,000통이 넘는 편지를 들고 무언가를 말해주기 위해 죽음의 세계로부터 돌아왔다.1)

  하버드대학원 시절인 1912년 엘리엇은 헤일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연극과 연출을 하고 대학에서 드라마와 스피치를 가르쳤던 헤일은 엘리엇에게 뮤즈와 같았던 여성이었다. 영국으로 귀화해 비비엔 헤이우드Vivienne Heigh-Wood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엘리엇은 아내가 정신병원에서 죽은 1947년까지 헤일과 30년 이상 교류를 했다. 공개된 편지를 보면 헤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고백, 불행한 결혼생활의 토로 등 엘리엇 자신의 내면이 생생하게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헤일의 이미지는 엘리엇 작품 도처에서 발견되고, 특히 대표적인 후기시인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의 「번트 노턴Burnt Norton(1936) 도입부는 헤일과 함께 했던 순간에 영감을 받아 이를 '시작과 끝', '시간의 영원'의 주제로 발전시킨 탁월한 시로 평가된다.2)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점을 가리키고,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가 기억 속에서 메아리치며

  우리가 가보지 않은 통로를 따라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을 향하여

  장미원 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도

  그처럼 그대의 마음속에 메아리친다. 

       「번트 노턴」6-15

 

  1960년 엘리엇은, 향후 공개될 편지들과 관련해, 자신은 어린 시절 사랑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과 사랑에 빠졌을 뿐이며, 그것은 환영이 환영을 사랑한 것이었다는 입지의 입장을 표명했다.3)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처럼 되살아나온 편지들은 그토록 낭만주의를 공격했던 엘리엇의 냉철한 지성이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서 강렬하게 솟아오르는 낭만주의적 감성을 제어하기 위한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문을 향하여/ 장미원 속으로" 사라진 그의 숨결이 어떻게 삶과 예술의 간극에서 문학작품으로 객관화될 수 있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며, '나의 시작에 나의 끝이 있다'라는 그의 명제처럼 끝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이 여행은 그간의 논쟁적 문제들을 풀어줄 풍요로운 문학의 향연이 될 것이다. ▩

 

  1) 엘리엇은 헤일에게서 받은 편지를 전부 불태워버렸으나 헤일은 엘리엇에게서 받은 1,131통의 편지를 1956년 프린스턴 대학교 도서관에 맡겨 두 사람 중 더 오래 산 사람이 죽은 지 50년이 지난 후 봉인을 열도록 했다.

  2) 1934년 엘리엇은 헤일과 함께 불타버린 장원, 번트 노턴을 방문했다.

  3) 엘리엇은 두 번째 배우자인 발레리Valerie Eliot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취지로 입장문을 끝내며, 편지가 공개되면 이 입장문도 같이 공개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이 두 번째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된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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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집 · 서울』 2021-5월(235)호 <고전에서 길을 묻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