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홧가게 아저씨
지연희/ 수필가,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같은 아침으로 시작하여 같은 밤이라는 이름으로 잇는 시간의 연속 속에서 하루와 한 달이 그리고 한 해가 저물고 다시 열리고 있다. 그 같은 반복된 의미들의 거듭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나이를 계산하고 세월의 빠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시간의 덧없음을 아쉬워하며 . 그럼에도 새해 첫날은 바로 그 아쉬움을 치유하는 가슴 부푼 희망을 설계하게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밤 자정에서 영시로 넘어가는 시각과 시각 사이 보신각 타종의 그 순간으로부터의 새해의 의미는 그렇게 규정짓게 된다. 그냥 어떤 변화를 꿈꾸고 어떤 시대로 가슴을 부풀린다.
거듭되는 내 일상 또한 내일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찾아올 것만 같은 희망으로 연속되고 있다. 분명 그 내일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임에도 기대하곤 한다. 그리고 일흔의 나이를 넘어 무임승차하듯 오늘 위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가 있다. 까닭에 우리는 같은 일의 반복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숨 가쁜 일상 속에서도 무료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밤과 낮을 걸어가지만 어제의 그 시간은 뒤돌아설 겨를도 없이 흘러가 버리고 만다. 무심히 흘러가버린 시간의 그 공간에는 잃어버린 순수의 내가 물기 마른 기억을 내려놓고 잠들어 있는 곳이다. 지워버릴 수 없는 삶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이제껏 내 삶의 바다에는 지울 수 없는 파편의 조각들이 파도 위에서 너울거리고 있지만 어린 시절 성탄절에 선물로 받은 한 권의 책은 평생을 살아가는 지표가 되어 나를 키우는 지렛대가 되고 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1년이 조금 넘은 12월 24일 동네 젊은 만홧가게 아저씨는 한 권의 책을 포장하여 선물로 주셨다. "HLKA 連續放送 東西敎養名言集 『마음의 샘터』 단기 4294년 10월 20일 정가 900원"이라 쓰인 책 한 권이다. "인간은 향상을 희망한다. 또 정의를 갈망한다. 그리고 불의를 미워하며, 보다 자기 자신을 높이 가지려고 노력한다." 이 책 서문의 첫 문장으로 쓴 이 글의 내용은 어쩌면 육십 년이 넘도록 나를 성장시킨 정신의 지주였다는 생각이다. 긴 세월 누렇게 바래도록 나를 지켜준 보물이다.
연희야! 이 조그마한 책이나마 읽으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될 것이다. 만홧가게 아저씨
한국문학전집에서 세계문학전집까지 대여해 읽기 시작하고 어느 시기에는 탐정소설을 빌려다 읽곤 했었다. 『셜록 홈스』, 『아르센 루팡』 등의 흥미진진한 소설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만홧가게 주인아저씨는 하루도 빠짐없다시피 하는 나의 독서 삼매경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더니 당신이 직접 책을 선별해 주시곤 했다. 자그마한 키에 그다지 말씀이 많지 않았던 젊은 아저씨는 한겨울 햇살처럼 따뜻하신 분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성탄절, 나는 생애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정신의 지팡이, 지각의 지주이며 헤아릴 수 없는 삶의 지혜가 가득한 『마음의 샘터』 그 책 안에 샘솟는 진리를 조각주각 가슴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한정 없이 변하여도 마르지 않는 샘을 내 가슴에 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얼어붙은 개울물이 녹아내리고 숨죽였던 생명의 씨앗들이 동토를 뚫고 생명을 돋아 올리는 신비로운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이 거짓 없는 순환의 시간도 지난가을 보도 위에 밟히어 바스락거리던 앙상한 낙엽의 순명()한 몸짓으로 흘러온 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종탑에서 울려 퍼지던 엷은 종소리에 한 소녀의 꿈이 시작되었다. 뒤돌아본 시간의 흔적 앞에 나는 무엇을 남겼는지 생각한다. 그곳에는 이제껏 수십 년을 곁에 두고 호흡해온 문학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내 모습이 보인다. 다만 한 권의 책이 나를 업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평생 지울 수 없는 만홧가에 아저씨가 서 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키 작은 아저씨가 책 뒷면 잉크 묻은 사연으로 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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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1-3월(233)호 <내 마음에 머문 사람 6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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