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허(虛)의 미학을 창조하는 일/ 정효구

검지 정숙자 2021. 6. 15. 02:17

 

    의 미학을 창조하는 일

 

    정효구/ 문학평론가 · 충북대 교수

 

 

  홍수 속에서 식수난을 겪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도처에서 언어가 넘쳐나는데도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부박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언어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에는 이미 우리들의 언어는 너무나 깊은 상처를 입고 객지에서 허덕인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현실을 만들어낸 것일까? 나는 이 지점에서 언어를 발하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살펴본다. 언어란 마음이 만든 산물이자 마음의 연장延長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살펴볼 때, 그곳엔 허심이자 허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른바 '허의 총량'이 마이너스 지점을 가리키며 위태롭다. '허'란 빈 공간이며, 빈터이며, 빈 세계이다. 무위의 영역이고, 자연성의 길이며, 무상의 시간이다. 이런 ''허'의 결여와 부재는 언어의 생명력을 고갈시킨다.

  우리 시단의 언어문제를 살펴볼 때도 위와 같은 언어 일반의 현실에 대하여 보낸 우려는 고스란히 겹쳐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리셋'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처럼 우리 시단의 언어들도 혼란스럽기 그지없고, 그 엔트로피는 극점을 앞에 둔 듯하다.

  이런 안타까움 속에서 나는 '허의 효용성과 그 미학'을 사유해본다. '허'에 대한 바른 앎을 구비하고, 그 허를 제대로 증장시켜 나아갈 때 우리들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자리와 더불어 소생과 신생의 기미를 보일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불교사의 고승인 네 분의 호를 음미하면서 '허의 성장과 성숙'을 말해보고자 한다. 그 네 분의 호는 탄허(呑虛 1913-1980, 70세), 경허(鏡虛 1849-1912, 63세), 함허(涵虛 1376-1433, 67세), 운허(耘虛 1892-1980, 88세)이다.

  탄허 스님은 화엄학의 대가이자 유불선 삼교를 회통시킨 고승대덕이다. 이분의 호인 탄허는 '허를 마신다'는 뜻이다. 허를 마심으로써 그분은 승려의 본분을 닦아가고자 한 것일 터이다.

  또한 경허 스님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허선사의 「참선곡參禪曲」은 아주 널리 알려진 게송의 고전이자 시작품이다. 만공滿空 스님의 은사이기도 한 경허 스님의 이 호는 허를 언제나 거울에 비추어보고자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다른 일체의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허만이 거울에 가득하게 될 때까지 허를 키워가고자 하는 숭고한 원력을 담은 것이리라.

  함허 스님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함허득통涵虛得通으로 당호와 법호가 함께 어우러져 불리어지곤 하는 함허 스님은 조선조의 배불정책에 항거하며 '현정론顯正論'을 떨친 분이다. 그분은 용기가 있었고, 소신이 있었고, 실력이 있었다. 함허라는 당호이자 별호의 함의처럼 허에 젖어든 삶에의 희구와 그것을 위한 정진이 이런 용기와 위력을 낳았으리라.

  운허 스님을 아는 사람은 특히 문단에 상당히 많을 것이다. 경기도 광릉의 붕선사에 주석하였던, 소설가 이광수의 팔촌동생이기도 한 운허 스님은 팔만대장격의 번역에 헌신한 역경불사의 대가이다. 운허 스님의 호는 허를 경작한다는 뜻인데, 이는 허를 온전하게 밭 갈고 농사짓는 경지를 염원한 심중의 표상이리라.

  지금 우리 시단은 무엇보다 허를 공부하는 일이 절박하게 요청된다. 탄허의 의미처럼 허를 일상으로 마시는 일, 경허의 뜻처럼 허를 날마다 거울에 비추어보는 일, 함허의 지향처럼 허가 몸에 젖어들게 하는 일, 운허의 함의처럼 허를 경작하는 일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자리엔 허의 총량이 늘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 시단과 그 언어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품격이 깃들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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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의 집 · 서울』 2021-6월(236)호 <문학의 향기>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