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얼굴 ·이름· 주소· 상징/ 정숙자

얼굴 · 이름 · 주소 · 상징 정숙자 1. 신의 선물_얼굴 아침저녁으로, 수시로 거울에 비치는 저 얼굴은 생명에 부여한 신神의 선물일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야 어떻게 솔기 없는 육체를 그리도 다양/섬세하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뿐 아니라 시공간에 던져진 ‘삶’의 실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영혼과 이목구비가 신의 사랑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의 선물이 생명일진대 어느 누가 감히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모는 아기를, 아기는 스스로를 아끼고 또 아끼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함께 성장한다. 아기가 부모님께 맨 처음 갚은 은혜는 방긋 웃어 보인 그 얼굴에 있다. 밤잠 안 자고 울며 보채던 아기가 언제인지 모르게 ‘방긋’ 웃는 얼굴로 눈 맞추었을 때, 부모는 온갖 시름을 잊어버린다. 사..

에세이 한 편 2022.04.07

향/ 최문자

○ 향 최문자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강명순 옮김, 열린책들, 2017)라는 작품을 읽고 나면, 괴기할 정도의 광기와 강렬한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18세기 근대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 속 주인공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향수를 만드는 것이다. 비천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추한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존재들의 미덕을 열망하게 된다. 결국 그는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를 25명이나 살인하여 그들의 머리카락에서 얻어낸 체액으로 향수를 제조한다. 그 악마적인 발상에도 불구하고이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고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얻고자 하는 최상의 선과 미는 인간을 통해 얻어진다는 작가의 의도..

에세이 한 편 2022.04.03

슬프네, 슬프네 하면서······ / 최문자

○ 슬프네, 슬프네 하면서······ 최문자 꽃 꿈이었다. 수선화 한 송이가 거실로 들어왔다. 슬프네, 슬프네 하면서 나를 따라다녔다. 슬프다고 나에게 도착하는 것과 슬프다고 나를 버리는 것 사이에 나는 서 있었다. 아침, 꽃들에게 물을 주면서 트로트 가수처럼 흰 꽃에게 물었다. '새삼스럽게 네가 왜 내 꿈에서 나와?' 꽃 꿈을 꾸는 동안 한 청년이 코로나 확진 후 다섯 시간 만에 죽었다는 뉴스가 시청 앞을 통과하고, 반포대교를 건너 남해 저구항에서 첫 배를 타고 소매물도까지 건너가는 동안 이윤설, 김희준 시인이 죽고, 최정례 시인까지 죽음을 포개는 동안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데 베란다에서 수선화 한 송이가 신나게 피고 있었다. 죽음은 꽃과 별과 죽은 자들이 변방에서 얼어붙은 채 감쪽같이 살아 있었던 거..

에세이 한 편 2022.04.03

위선환_Poem Essay『비늘들』/ 077 ⦁ 082

비늘들 · 077 위선환 어떤 시는 불편해도 참으며 읽는다. 시인이 시에 집중했구나, 진지했구나, 야위며 앓으며 썼구나··· 시와 시인이 함께 읽히는, 오히려 시인이 먼저 읽히는 시가 그렇다. 이때에 내가 읽는 것은, 생소한 어법으로 쓴 문장이어서 낯선 문자의 순열일 수도 있다. 서툴지만 애써서 읽는다는 자각 하나로 점자책을 더듬어가듯이, 집중하여 모난 자음의 모서리를 만지고, 문자가 상형하는 낯선 세계의 깊이와 높이와 극한을, 확장과 이연과 단락을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 향수가 있는 다른 세계이다. 언어가 낭비되고 시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구태여 불편을 견디면서 그런 시를 읽는 것은 그 시를 쓴 시인의 태도에서 궁극이나 본연을 탐색하는 노력이 보이기 때문이다. -전문- --------------..

에세이 한 편 2022.03.25

위선환_Poem Essay『비늘들』/ 144 ⦁ 165

비늘들 · 144 위선환 김제 가서, 겨울 하늘에 구름 덮인 것, 추운 하늘이 추운 그늘을 내려서 대지를 덮은 것 본다. 대지는 검고, 두둑과 고랑과 둔덕과 여러 군데에 희끗희끗 눈이 묻어 있다. 오래 기다려야 했으므로 추웠고, 떠는 이빨들은 이빨들끼리 부딪치며 떠는 소리를 냈고, 호남평야의 중심에 떨어진 별 한 조각이 아까부터 빛난다. 견디는 일이란 것이 기다리며 떠는 일이므로, 추운 겨울에 추운 들판에 놓인 볕 한 조각이 떠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므로···. -전문- ----------------- 비늘들 · 165 "기러기는 하늘을 날고 있는데, 기러기의 그림자는 강물을 건너가고 있으니···." 내가 썼던 시 「불가사의다」 전문이다. 첫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에 실릴 시로써 2001년 4월..

에세이 한 편 2022.03.25

지지대비각/ 김훈동

지지대비각 김훈동 슬픔의 세월 삭이며 홀로 선 느티나무처럼 지지대비 외롭게 하늘 향해 발꿈치 치켜세웠네 색바람에 애틋할 말마저 잊었나 스물네 해 조선을 짊어진 정조 어디쯤 수척한 용안 누이고 있을까 사도세자 향한 가늠되지 않는 사랑 느릿느릿 왕의 행차 환궁 길 먼데 현릉원 돌아서지 못해 애통한 맘 머무르고 싶은 아린 맘 맺힌 적요한 지지대비각에 소담스런 눈발만 흩날린다 -전문- ◈ 죽은 아버지에 대한 정조의 애틋하고 그리운 마음이 맴도는 언덕에 지지대비각遲遲臺碑閣이 있다. 정조는 창덕궁을 떠나 수원 행차할 때마다 사도세자가 잠든 현륭원이 보이는 고개에서 "왜 행렬이 이리 더디냐"며 재촉했다. 참배하고 환궁할 때는 이 고개에서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디 가고 싶어 지체했다'는 곳이다. 순조 7년에 부왕..

에세이 한 편 2022.03.10

다산(茶山)의 매조도를 보면서/ 이응철(수필가)

다산茶山의 매조도를 보면서 이응철/ 수필가 -묵은 가지 다 썩어서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이 활짝 피었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깃이 예쁜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겠지 -「梅鳥圖」, 茶山 정약용 세계를 들먹이는 코로나 역병으로 집안에만 거하다 보니 연일 답답함이 영육을 우둔케 한다. 한 해의 끄트머리 동지섣달이라 아시타비我是打碑, 나는 옳고 남이 그르더란 문자가 속 빈 강정 같은 한 해를 반성케 한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다녀온 강진 다산 문학관을 돌아보며 유배 생활하던 다산의 생을 그려본다. 귀양살이 18년, 박달나무처럼 속이 꽉 찬 선비, 대꼬챙이, 5백 권의 저서를 쓰느라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닳도록 학문에 전념한 선비, 특히 지지난해 유배지에 시집올 때 입었던 ..

에세이 한 편 2022.03.01

석탄 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향하여/ 정연수

석탄 유산의 유네스코 등재를 향하여 정연수 우리나라의 일출 명소를 꼽자면 늘, 정동진이 으뜸이다. 정동진이 탄광촌이었다고 소개하면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다. 강릉 시민조차 "처음 듣는 얘긴데 정말이에요?" 라며 반문할 정도이다. 정동진을 포함한 강동면에는 31개의 탄광과 광부 사택이 있었고, 저탄장의 검은 탄가루가 해풍을 타고 마을로 날아들었다. 1960~1980년대 정동탄광지구(정동진리, 상성우리, 심곡리) 주민 80%가 석탄산업으로 생계를 꾸리는 전형적인 탄광촌이었다. 드라마 이후 일출의 명소로 재장소화하더라도 탄광촌으로 기능한 기억은 기려야 할 소중한 역사이다. 석탄산업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는 운동을 삼척의 김태수 시인과 함께 시작했다. 삼척 · 태백 · 정선 · 영월 등 4개 시군의 ..

에세이 한 편 2022.02.26

시는 상징이다/ 김주연(문학평론가)

시는 상징이다 김주연/ 문학평론가 상징이 뭘까. 아주 쉽게 말해서, 그 글에서 쓰여진 언어가 지시어指示語가 아닌, 지시된 사물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 혹은 추상어를 구체적인 사물로 표시하는 것. 가령 사람을 보고 "당신은 꽃이다"라고 적는다면, 당신 곧 꽃이라는 사물이 아니라 꽃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때 "당신은 꽃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적는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적어도 '시적詩的'이지는 않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런 말을 새해 아침부터 늘어놓는 까닭은? 수만 명을 헤아리는 시인들이 우리 시단을 풍성하게 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의 빈곤, 그 상징을 가능케 하는 상상력의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상징과 상상력은 궁핍한데 시와 시인은 많다? 대체 어떤 시와 시인들일까. 물론 상..

에세이 한 편 2022.02.25

2월을 가장 사랑한 작가/ 임헌영

2월을 가장 사랑한 작가 임헌영 2월, "오는 봄의 먼 치맛자락 끄는 소리는/ 가려는 '찬 손님'의 무거운 신발 끄는 소리인가"(변영로「2월 햇발」)라는 달이자, "봄보다 한 걸음 앞서 우리들 마음속에 봄이 오는 달"(박목월 「춘신春信」)이다. 이 달을 가장 사랑한 작가는 단연 빅토르 위고였다. 그는 생일이 2월 26일에다 출세작인 사형수 폐지 운동의 선구적인 소설 『사형수의 마지막 날』을 출간한 달(1829년 2월)이었고,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문예사조를 바꾼 운문비극 『에르나니』를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에서 첫 공연한 날(1830년 2월 25일)이었다. 도냐 솔이란 처녀를 두고 고메즈 공작과 돈 카를로스 왕, 왕에 적대하다가 피신 중 산적이 된 에르나니가 삼각 대결을 벌였으나 여인의 사랑을 차지한 것..

에세이 한 편 2022.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