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346

「정인지서」의 진실과 감동을 나누자/ 김슬옹(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정인지서」의 진실과 감동을 나누자 단군 이래 최고의 명문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인류 문명의 기적,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과 8인의 공저이고 8인의 대표는 세종보다 한 살 많았던 정인지이다. 정인지는 세종의 신하였고, 학문의 동지였으며 당시 대제학으로 덕망 있는 사대부였다. 세종의 수학 스승이었을 만큼 수리, 천문,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한 융합 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해례본에 마지막 부분에서 남긴 이른바 「정인지서(정인지 서문)」는 훈민정음의 감동과 진실을 가장 정확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풀어내고 있다. 나는 감히 이 서문을 단군 이래 최고의 명문으로 추켜세우고자 한다. 전문을 그대로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므로 해설은 최대한 줄이기로 한다. 「정인지서」는 주제로 보면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졌..

에세이 한 편 2022.11.19

저녁놀을 보고/ 유종호

저녁놀을 보고 유종호 작년 추석에는 비가 내렸다. 보통 봄비나 가을비는 조용히 오는데 제법 요란하게 비가 내렸다. 그래서 비 오는 추석날은 처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더니 밤중에는 요란한 청둥소리에 이어 번개도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였다. 같은 서울에서도 소나기가 억수로 퍼붓고 하천이 범람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햇볕이 쨍쨍 내려쪼이는 곳이 있다. 그러니 비 오는 추석도 지역마다 달랐을지도 모르나 내가 사는 양천구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다. 그런데 2022년 올 추석에는 저녁나절 온 하늘의 구름이 벌겋게 물들어 오랜만에 저녁놀을 보게 되었다. 다만 우리가 어려서 보았던 새빨간 놀이 아니라 분홍색에 가까운 엷은 놀이라는 점이 달랐다. 온통 서쪽 하늘 전체가 짙은 새빨간 놀을 드러내..

에세이 한 편 2022.11.17

기다림의 여심(女心)/ 김용철(소설가)

기다림의 여심女心 김용철/ 소설가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 그중에서도 자신이 보고 싶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편 아름답고 한편 슬픈 일이다.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보면 아름다운 노릇이지만,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을 여영 만나지 못해서 절망과 고독의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처럼 괴롭고 슬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愛別離苦/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怨憎會苦"고 했다.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싫은 사람을 만나서 생기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사 고통 아닌 것이 없다. 전자는 사랑 때문이며 후자는 미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고통의 바다..

에세이 한 편 2022.11.15

경계 없는 나라/ 문효치

경계 없는 나라 문효치/ 시인 내 젊은 시절은 죽음과 바로 옆에서 지냈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어른거렸고 나는 그것이 보내오는 두려운 표정에 가위눌리곤 했다. 그것은 집요하여 내 일상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여간해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밥을 먹고 시간을 소비하는 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한 궁리로 채워졌다. 이 공포의 굴레를 벗어나 평화를 찾는 일이 나에겐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좀처럼 이 과제를 풀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우연히 무령왕의 목관재木棺材 앞에 서 있었다. 늘 기진맥진, 탈진 상태의 육신은 의욕도 꿈도 없었지만, 무엇인가 나를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이끌었다. 나는 처녀분處女墳으로 발견된 왕릉의 유물들을 대충 둘러본 후에 옻칠이 남아 있는 목관재를 멍하니 바..

에세이 한 편 2022.11.14

오세영 산문집『곡선은 직선보다 아름답다』「아이오와대학 캠퍼스의 오리 떼들」

아이오와대학 캠퍼스의 오리 떼들 오세영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1987년 가을, 나는 미국의 아이오와대학교에서 주관하던 '국제 문학창작 프로그램(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해외공보처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아이오와대학교가 세계 20여 개 국가들의 시인, 작가들 30여 명을 초청해서 6개월 동안 각개 민족 문학들 간의 상호 교류와 세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한 국제적인 문학창작 워크숍이다.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나로서는 이 프로그램에의 참여가 첫 미국 체험이어서 그랬던지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상생활에서 보여주었던 미국인들의 환경 보호 의식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지금은 우리 국민들도 이에 남다른..

에세이 한 편 2022.10.28

오세영 산문집『곡선은 직선보다 아름답다』「엄지손가락의 그 피 한 방울」

엄지손가락의 그 피 한 방울 오세영 나의 유년시절은 철이 없었다. 동네 개구쟁이들과 뛰어노는 데에 정신이 팔려 공부를 하지 않았다. 황룡강에 가서 헤엄을 치거나 물고기를 잡는 일, 들판의 종달새 집을 뒤져서 알들을 훔치는 일, 인근 산에 올라 칡을 캐는 일, 연날리기나 들불놀이 같은 것들에 골몰하는 일 따위에 더 신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일은 뒷전이었고 초등학교 시절의 내 성적은 항상 반에서 20등 내외를 면치 못했다. 결혼하신 지 채 2년도 되지 못한, 그러니까 나를 낳기도 전인 그해에 지아비(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시댁이 낯설어 그냥 친정에 눌러앉게 되셨다. 외가는 전라도의 소지주 집안이었다. 홀로된 딸과 외손 정도는 충분히 거둘 수 있는 재력을 지..

에세이 한 편 2022.10.28

강영은_ PPE(poem, photo, essay)『산수국 통신』/ 제주 한란(발췌)

제주 한란(발췌) 강영은 비바리는 제주에서 자생한 꽃이다 제주의 흙 속에 묻힌 진짜 뿌리가 아니면 잎과 줄기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진짜를 흉내 내는 가짜 뿌리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마존 유역에는 몇 개씩 달고 다니는 부족도 있다 가짜가 피우는 것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이다 비바리는 바다를 길들이는 고래를 꿈꾼다 외로울수록 차고 높은 호흡을 내뿜는다 이어도를 바라보는 꽃은 그렇게 살촉을 매단다 도시마다 그녀를 복제하는 꽃집이 있다지만 손돌이추위 속에서도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선돌 앞이나 고래 심줄 같은 물줄기가 등을 껴안는 돈내코 부근에 암노루처럼 보짱한 그녀들을 볼 수 있다 사철 푸른 나무들이 꼿꼿이 서 있는 해발 900미터 눈 속을 달리는 두 다리가 섬 밖으로 치우치지 않는 그곳이 그녀들의..

에세이 한 편 2022.10.13

강영은_ PPE(poem, photo, essay)『산수국 통신』「산수국 통신」

中 산수국 통신(전문) 강영은 10년 전, 반 귀향을 했다. 건강 때문이었지만 향수 달래기, 혹은 귀소본능이라는 명목하에 가족의 허락을 받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살게 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중산간 마을 외곽에 자리 잡은 처소는 하루 종일 한두 사람 올까 말까 한 외진 곳이다. 잡초를 뽑거나 집 앞에 늘어선 제밤나무에게 말을 거는 일이 전부이지만, 느리게 하루를 소일하다 보면,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난 느낌을 준다. 집 앞 계곡의 웅덩이에서 쏟아지는 개구리 울음소리와 마당 가득 내려앉은 별무리들이 나를 지키는 호사 속에서 혼밥을 먹는 외로움만큼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진다. 자유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위리안치된 중죄인처럼 자유를 받아든다. 나와 주고받는 말 외엔 말이 필요..

에세이 한 편 2022.10.13

정재분 산문집『푸른 별의 조연들』「낙타」

낙타 정재분 슬픔이 모자라다 절망이 모자라다 꼽추 등이 낙타 무릎을 꿇어 등을 낮추는 짐짝만한 제 몸과 인간의 짐을 지고 고꾸라질 듯, 가는 다리 곧추세워 모래폭풍 속으로 걸어가는 공양하는 몸을 부리기에는 한낮 정수리 위의 태양과 싸늘하게 식는 사막의 밤을 지새워 독으로 익는 전갈의 꼬리 만큼 절박해져서 오뉴월 붉은 고추처럼 매워져서 긍정밖에 모르는 긴 속눈썹을 잊고 낙타 등에 올라타기에는 내일은 소설, 대기권에서 살아남은 긴 꼬리 유성이 쏟아질 것이라고 한다 -전문 (p. 101-102) ▶ 3부 푸른 별의 조연들→ 반추에 관하여 → 야크 (中) 「낙타」 소목 솟과의 동물로는 소를 비롯하여 야크, 아프리카의 누, 염소, 임팔라, 가젤들이 있다. 그중에서 야크는 해발 5,000미터 고지의 척박한 환경 속..

에세이 한 편 2022.10.11

정재분 산문집『푸른 별의 조연들』「방초」

방초 정재분 한 가닥 향내가 후각을 사로잡았다. 향이 이끄는 대로 시선이 따라가려니 여리디여린 두 닢 이파리가 반짝거렸다. 떡잎을 보면 안다더니 윤기가 유달랐다. 몸을 낮춰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를 고것에 향기가 없다면 눈여겨보았을까. 들숨에 뒤섞인 방초에서 진지한 약성이 폐부로 전해졌다. 여차하면 토라지는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반겼다. 햇살도 신나는 듯 새순 위에서 첨벙첨벙 뛰놀았다. 두 해 전, 당귀 열 뿌리를 심었다. 그중에 네다섯에서 잎이 나는가 싶더니 맥을 못 췄다. 돌아서기가 무섭게 껑충 자라는 거친 풀숲을 알뜰히 막아주지 못했다. 한겨울을 이겨내고 싹이 돋기에 이제는 잘 크려니 했는데 두어 개, 그마저 사라지고 이듬해 한 그루에서 꽃이 피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 미세한 공기의 변화 ..

에세이 한 편 2022.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