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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옥 칼럼집『항아리부터 깨라』(발췌)/ 시로 풀어내는 반전의 삶

검지 정숙자 2022. 3. 4. 02:05

 

    시로 풀어내는 반전의 삶

 

    강기옥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라는 호를 사용할 만큼 호방했던 이규보는 생전에 팔천 여 수의 시를 남겼다. 김부식이 간과했던 동명왕을 민족의 대서사시로 되살려낸 그를 대문장가로 칭송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기동奇童이라 했고, 천재라 할 만큼 공부를 잘하여 과거의 예비시험에는 항상 수석을 했다. 부친 역시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개성의 최고 사립학교인 문헌공도에 보내고 족집게 과외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대과의 예비단계로 '국자감시'를 봐야 하는데 16세에 응시한 국자감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했다. 2년 뒤에도 낙방하여 20세에는 아예 응시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그에게 '규성奎星'이라는 도인이 꿈에 나타나 이번 과거에는 장원할 것이라고 점지해 주었다. 그래서 본명 '인저仁氐'를 규보奎報로 바꾸고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다. 규성이라는 분이 알려주었다 하여 규보로 바꾼 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대과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런데 또 체면이 깎였다. 3등도 아닌 최하위의 '동지사'로 합격한 것이다.

  겨우겨우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무려 9년의 공백이 필요했다. 그 무료한 세월에 그는 붓을 잡았다. 주필 走筆이라 할 만큼 시를 빨리 쓰는 그를 당나라의 이백과 비교하곤 했다. 그 팔팔한 기백은 동명왕의 대서사시로 결실을 맺었다. 술로 허송할 것 같은 9년이 민족의 자존심을 세운 것이다. 그러는 동안 권력층에 지방직이라도 한자리 달라는 구직의 시를 보내는 비굴함을 보여 이덕무의 혹평을 받기도 했으나 대문장가의 서사시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결국 그의 불운이 고구려의 웅대한 동명왕 이야기로 피어나 민족의 자존심을 깨우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山僧貪月光산승탐월광/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甁汲一壺中병급일호중/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위 '영정중월井中月'이라는 제목의 시에는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사상이 담겨 있다. 담백한 삶의 무욕이 신선과 같은 생으로 이어져 불교적이면서도 도가적인 경지를 잘 드러냈다. 시의 마귀魔鬼가 들어 시를 쓰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무병巫病의 경지에서 그는 오히려 유유자적한 삶의 여유를 즐긴다.

 

  年已涉從心연이섭종심/ 이미 칠십 년을 지나 보냈고

  位亦登台司위역등태사/ 지위 또한 三公에 올라 보았네

  始可放雕篆시가방조전/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 만도 하건만

  胡爲不能辭호위불능사/ 어찌하여 능히 그만두지 않는가

    (중략)

  一着不暫捨일착불잠사/ 한 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使我至於斯사아지어사/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日日剝心肝일일박심간/ 날이면 날마다 간장을 도려내

  汁出幾篇詩즙출기편시/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네

  滋膏與脂液자고여지액/ 내 몸의 기름과 진액은

  不復留膚肌불복류부기/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지 않다네

 

  시인이라면 이규보와 같은 글쓰기를 시도해 봐야 한다. 얼마나 처절하고 살을 깎는 시작활동인가. 그래서 제목도 '시마詩魔'다. 

 

  2019년이 황금돼지 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일제가 남긴 띠동물의 색채는 허상이자 허위일 뿐, 아무런 실체도 없다. 황금돼지의 행운보다는 어려움이 더 많았다. 이 시기에 문인은 무엇으로 세월을 메워야 할 것인가.

  이규보처럼 불운한 시기를 오히려 보람되게 반전을 꾀하는 멋진 작품집을 남기면 어떨까. 황금돼지 해인 만큼 황금과 똑같은 달걀 프라이를 안주하여 잔잔한 음악과 신선한 이슬을 곁들이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삼혹호가 아닐까. ▩ (p.15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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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기옥 제2칼럼집 『항아리부터 깨라』 2021. 12. 15. <도서출판 Gaon> 펴냄

  * 강기옥/ 시집『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하늘빛 사랑』『오늘 같은 날에는』등, 평론집『시의 숲을 거닐다』『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 칼럼집『칼을 가는 남자』, 인문교양서『문화재로 포장된 역사』, 역사 · 문화안내기『국토견문록』『서초이야기 1』『소초이야기 2』,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