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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인재 키우기, 사가독서/ 강기옥

검지 정숙자 2022. 3. 4. 15:33

 

    세종의 인재 키우기, 사가독서

 

    강기옥

 

 

  세종을 상징하는 기관은 현전이다. 집현전은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아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조언하며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세자에게 유교 경전을 강론하며 훌륭한 왕재로 기르기 위한 교육의 주된 활동이다. 그것이 점차 외교문서 작성과 과거 시험 및 실록 편찬 사관史官의 일까지 겸하고,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고 책으로 편찬하는 사업까지 주관하다 보니 집현전 학자들은 개인적으로 독서할 시간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하여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인 세종은 주택, 염전, 천문, 지리, 역사, 의례, 군사, 법률, 음악 등 모든 분야를 연구하게 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려 했으니 그 사업에 참여한 학자들이 다른 부서로 옮기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창손이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이 15년, 신숙주가 10년을 근속했다.

 

  세종은 이들이 풍부한 소양을 기르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실시했다. 근무지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특별 휴가를 주는 제도다. 교회 목사나 대학교수의 안식년제와 비슷한 제도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1~12절에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6년 일하면 한 해를 쉬라는 것이 안식년이고 일곱 안식년을 지난 50년째는 희년으로 지키라는 제도이므로 안식년의 뿌리는 기독교에 있다.

  세종대왕이 그 안식년 제도를 알았을 리 없으나 학자를 아끼는 마음에 이 제도를 도입했으니 세종은 인재를 아끼고 키울 줄 아는 성군이었다. 처음에는 시설이 없어 사가私家에서 독서를 하게 했으나 독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은평구의 진관사를 이용하기도 하여 상사독서上寺讀書제를 적용하기도 했다. 후대에 들어서는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장의사를 이용하기도 하고 용산의 폐사지에 남호독서당, 옥수동의 도모포에 동호독서당을 지어 제도적으로 보완했다. 국가적으로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독서를 권장한 세종, 그의 뜻에 맞게 독서에 열중하여 국가의 시책을 개발한 사가독서 학자들은 여름 더위는 물론 겨울의 추위도 독서로 이겨냈으리라.

 

  ○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권채權綵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 · 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 8년(1426) 12월 11일

 

  처음 3명으로 시작한 일종의 재택근무는 단종 원년(1453년)에는 4명, 세조 4년(1459년)과 연산군 2년(1496년)에 최고의 인원인 14명이었으나 평균 6명을 유지했다. 성종조에는 서거정이 재가독서와 상사독서上寺讀書의 폐단을 지적하며 상설 독서당의 필요성을 제기하자 용산강에 독서당을 지었다. 그것이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다.

  이후 연산군은 1504년의 갑자사화를 계기로 사가독서제를 폐지했으나 중종은 1507년에 숭인동의 정업원淨業院을 잠시 독서당으로 사용하다가 1517년에 제안대군의 사저였던 두모포豆毛浦의 정자 자리에 독서당을 지었다. 이것이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이 일 때까지 만 75년 동안 도서열람이 가능한 도서관의 기능을 감당했다. 임진왜란으로 독서당이 불타버리자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광해군은 즉위년(1608년)에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당으로 사용했다. 독서당은 그렇게 면면을 유지해오다가 정조가 규장각을 세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국가의 권력기관이라기보다는 학문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기에 인재를 아끼는 임금일수록 애착을 보였다. 그런 만큼 성종 7년(1476년) 6월 27일 조에는 권장 사목事目으로서 엄격한 지침이 보인다.

 

  첫째, 읽은 경사經史의 권수를 절계(節季 3 · 6 · 9 · 12월)마다 개사開寫하여 아뢸 것.

  둘째, 매달 세 번 제술製述하되, 예문관원의 월과月課와 함께 동시에 저술하게 할 것.

  셋째, 정월 · 동지와 큰 경사 · 큰 하례 때 모두 미치는 것 외에는 참여하지 말 것.

 

  큰 행사 외에는 참여하지도 말고 독서에 충실히 하여 논술문도쓰고 자기 연찬의 결과물을 보고하라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독서를 권장하며 독서를 통해 인재를 양성했던 사가독서 제도는 우리 민족이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하는 제도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낀 나라로서 독서량이 가장 낮은 국가로 전락했다.

  독서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전자기기의 무한한 공간 속에 나도는 폭력물과 음란물의 폐해는 독서의 또 다른 음지다. 독서는 인격 수양의 방법으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예의와 교양을 쌓고 전문지식을 얻는 행위를 전제로 해야 한다. 순간의 쾌락을 즐기고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방법을 익히는 교사敎唆물로서의 독서는 오히려 해악이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義自見을 갈파한 동우童遇의 고사를 생각하며 옥수동의 동호독서당 자리를 찾는 것은 여름 피서의 한 방법이다. 더구나 독서를 통해 학자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경영술을 보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생각하면 민족의 자존심이 솟아나 쑥쑥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극동아파트 입구 7동 앞에 있는 독사당비는 매봉을 등지고 한강을 마주하고 있어 서울 전체에서도 지리적 조건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지역이다. 지금은 산등성이를 온통 아파트가 차지하고 있어 경관이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극동아파트 1동 옆길로 난 산길을 10여 분만 오르면 눈앞에 열린 한강과 강남의 풍경은 가히 한 폭의 산수화를 열어 답사객의 노고에 보답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한 제안대군이 성인으로 성장한 이후 가슴을 짓누르던 한을 저 강물에 띄웠으리라. 예종의 적장자였으니 당연히 제안대군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지만 노회한 정치인 한명회와 신숙주는 제안대군을 적장자 이전에 실권이 없는 어린 왕자로만 보았다. 조선왕조의 역사가 숨어 있는 현장에서 피서의 독서에 취해보면 어떨까. ▩ (p. 18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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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기옥 제2칼럼집 『항아리부터 깨라』 2021. 12. 15. <도서출판 Gaon> 펴냄

  * 강기옥/ 시집『그대가 있어 행복했네』『빈자리에 맴도는 그리움으로』『하늘빛 사랑』『오늘 같은 날에는』등, 평론집『시의 숲을 거닐다』『느림의 계단에서 읽는 시』, 칼럼집『칼을 가는 남자』, 인문교양서『문화재로 포장된 역사』, 역사 · 문화안내기『국토견문록』『서초이야기 1』『소초이야기 2』,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