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비에게
이연옥
가곡 '나비에게'라는 시가 태어나게 된 아침이 있었다.
밤새 한 줄기 비가 지나간 아침이다. 구름 속에서 활짝 솟은 아침 햇살이 발길을 밖으로 몰고 간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할 겸 텃밭으로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눈이 부시게 피어 있는 꽃 한 무더기가 황홀하게 한다. 샤스타데이지, 하지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이슬에 젖어 있다. 하얀 꽃잎에 노란 꽃술이 든 꽃은 언제 보아도 희열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슬에 촉촉하게 젖은 아침 꽃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야채를 뜯으러 가던 발길을 샤스타데이지꽃 쪽으로 옮겼다. 이슬에 젖은 꽃들이 물빛 서슬을 입은 것 같다. 방울방울 이슬을 이고 있는 꽃송이들이 새로워 보인다. 촉촉한 느낌의 꽃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찬찬히 꽃을 들여다보는데 렌즈 안에 하얀 나비가 들어왔다. '아, 흰 나비가 흰 꽃 위에 앉은 거야.' 나도 모르게 속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나비와 같은 색깔의 흰 꽃 위에 앉아서 아무도 못 찾을 거라고 방심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흰 꽃 위 흰 나비는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내 카메라에 들켜버리고 만 것이다. 살그머니 꽃 주위를 맴돌았다. 나비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나비는 고치에서 툭 떨어져 나온 이 세상이 두려워 아직 날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여 제 빛깔의 꽃잎에서 기억에도 없는 사랑을 찾고 있는 것일까? 나비가 날아갈까 봐 들키지 않으려고 까치걸음으로 나비를 들여다보았다. 날개는 날아갈 듯한 자세다. 머리는 노란 꽃술과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하다. 제 머리 몇 배 길이의 더듬이로 꽃 밖의 세상을 더듬고 있는 하얀 꽃 위의 흰 나비.
꽃과 나비가 같은 흰 색이어서 사진으로 담으면 안 보일 거라 생각이 들었는데 나비와 꽃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카메라의 셔터소리에 놀랄까 봐 망설이며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를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찍는데 나비는 어떤 동작도 하지 않는다. 갑자기 죽은 나비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건드려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분명 죽은 나비는 아니었다. 흰 꽃이 자기의 동족이라도 되는 듯 나비는 편안히 꽃술을 음미하면서 어떤 움직임도 없다. 지난 밤 험한 곳에서 밤을 지새우고 곤한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행여 날아갈까 봐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관찰을 하였다. 나비는 죽은 듯이 있다. 그때 머리의 몇 배가 되는 두 개의 더듬이가 떨리는 걸 보았다. 더듬이 한 쪽은 하늘을 향하고 한 쪽은 땅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하늘과 땅에 어떤 송신이라고 보내고 있는 것 같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어떤 사랑에게 송신을 보내고 있는 걸까? 이 곳에 어떤 그리움이 있어서 떠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하는 턱없는 상상을 하며 나비를 본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훅, 불어보고 싶다. 하지만 저리 곤하게 잠자는 나비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만두었다.
흰 나비는 그해 봄이 지나갈 무렵 처음 만난 나비였다. 흰 꽃 위에 흰 날개 펴고 죽은 듯이 앉아있는 나비를 보며 죽은 듯이 살고 있는 내 삶을 보는 듯해서 슬펐다.
내가 살아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많는 가족 속에서 눈만 뜨면 몰아치는 일에 묻혀서 집안에서 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누구도 손잡아주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삶을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하는 물음표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욕심도 거짓도 없는 내가 있지만 어디에서도 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해도 내가 없었다. 나는 없지만 묵묵히 움직이는 핏줄 속에는 들끓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때 없이 대상 없는 어떤 사랑이 물밀 듯이 몰려와 가슴이 아팠다. 삶이 슬펐다. 하지만 이 슬픔을 박차고 일어설 날이 올 거라는 끈적끈적한 희망이 있었다. 대상 없는 사랑이 형체가 없이 나타나 나를 자꾸 불러 세웠다. 보이지 않는 것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보이지 않는 날개가 자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엇 때문에 가슴이 아픈지 몰라 연필로 끄적거렸다. 흰 나비의 더듬이처럼 형체 없는 사랑이 떠올라 가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흰 꽃 위 흰 나비였다.
조혜영 작곡가가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쓴 시에 곡을 붙여서 가곡이 되었다. 작곡가는 이 노래에 곡을 붙이면서 이 시로 된 노래가 많은 사람에게 불려 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합창단에서 정기 연주곡으로 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유튜브를 찾아 보니 많은 합창단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합창단에서 부르는 노래를 눈을 감고 듣는다. 내 이야기를 노래로 듣는다. 슬픔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나비에게' 노래시 전문이다.
아직도 잠들고 있는 거니
아직도 잠들고 있는 거니
희디흰 꽃잎 위에 흰 날개 펴고
파르라니 떨며 앉아 있는 너는
허공을 날아 또 다른 세계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거니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거니
보일 듯 말 듯 한 꽃에 앉아
바람 불어 꽃가지 흔들려도
보일 듯 말 듯 한 꽃에 앉아
너는 앞날을 예감하고 있구나
밀물지듯 밀려오는 사랑의 굴레들
굳이 아니라고 말 못하는 너는
하얀 꽃잎 위에 있는 듯 없는 듯
천 년이라도 바라보고만 있니
꽃잎을 날아오르는 순간
꽃잎을 날아오르는 순간
수없이 부딪혀 올 그리움
수없이 부딪혀 올 그리움
파르르 파르르 가슴 저리겠구나
p. 시 113-114/ 론 10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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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집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2021. 12. 25. <예술가> 펴냄
* 이연옥/ 1997년『문학공간』신인상, 2010년『예술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나비의 시간』『연밭에 이는 바람』『산풀향 내리면 이슬이 되고』, 가곡 작사「나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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