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야생 붓꽃/ 루이스 글릭 : 류경희 옮김

검지 정숙자 2021. 4. 18. 03:17

 

    야생 붓꽃

 

    루이스 글릭/ 류경희 옮김

 

 

  고통의 끝에는 문이 있었다

 

  죽음이라고 불리는 문을

  기억한다

 

  머리 위에는 소나무 가지들이 부스럭거리고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희미한 태양만이 메마른 대지를 비춘다

 

  검은 흙에 묻힌 채로

  의식으로서 살아있는 것은 끔찍하다

 

  그리고 끝이 났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운명

  급작스레 말 못하는

  영혼이 되는 것. 딱딱한 땅이 조금 움직

  이고 키 작은 관목숲을 새들이 뛰어다닌다.

 

  다른 세상에서 이곳에 온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말한다

  나는 목소리를 되찾았다

  무에서 돌아오는 자는

  목소리를 찾으러 오는 것이다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장엄한 샘이 솟아나 짙고 푸른

  그림자를 맑은 하늘빛 바다에 비춘다

     -전문-

 

  루이스 글릭의 수상과 세계시의 조류/ 땅 속에 잠든 붓꽃이 봄을 기다리듯(발췌)_류경희/ 시인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여류시인 루이스 글릭에 대하여 스웨덴 한림원은 '절제하는 명징한 언어의 아름다움과 함께 개인의 존재를 우주 보편적으로 승화시키는 뚜렷한 시적 목소리를 가짐', '고통스러운 가족관계를 시적 장식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함'이라고 평가했다.

  ⟪뉴욕 타임즈⟫는 '표현이 명징하고 진솔하며 유머와 위트가 있으며 풍부한 지식과 심오한 느낌을 주며 인간의 슬픔을 알게 해주며 시문학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 

  그녀의 시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야생 붓꽃」이다. 신은 삶과 죽음의 은유를 밤과 낮에 숨겨두었다. 땅 속에서 잠들어 있는 붓꽃은 아마 우리가 잠들어 있는 상태와 비슷할 것이다. 삶과 죽음의 중간지대라고나 할까, 죽음이 주는 젖을 먹고 미래의 모체가 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은유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붓꽃은 잠이 들어있다. 1년이 될지 수만 년이 될지 모르는 잠에 소나무 가지와 새들의 수런거림을 들으며 또한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얼마나 장구한 시긴을 담고 있는가. 우리 기억 속에는 첫 번째 살인사건을 보았던 눈과 첫 번째 눈을 맞았던 촉감, 첫 번째 빗소리를 들었던 귀가 살아있지 않는가. 사물들은 언제나 사람들과 말을 할까. 우리는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야생 붓꽃을 읽으며 떠오르는 질문이다. (p. 시 331-332/ 론 322 (···) 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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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문화』 2020-겨울(56)호 <노벨 문학상 특집> 에서

  * 류경희(Alexandria Ryu)/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내가 침묵이었을 때』, 영시집ink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