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시

나 죽을병에 걸려/ 크리스틴 드 피장 : 정과리 옮김

검지 정숙자 2021. 4. 1. 01:22

 

    나 죽을병에 걸려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 1347?-1430?) : 정과리 譯

 

 

  나 죽을병에 걸렸네.

  내 인생에 이처럼 힘든 때가 없었네.

  내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그이가

  장가간다고 하네.

  나 죽어가고 있는데, 기뻐 죽겠다고 하네.

 

  아이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한 게 언제인데···

  제 마음 속에 온통 나뿐이라,

  내 마음 속에도 저만 있어달라고.

 

  그래놓곤 못된 길로 빠져, 나를 차버렸네.

  내 고장을 버리고 떠나

  다른 처자와 함께 살겠다고 가버렸으니

  나하고는 전쟁이로구나

  사랑을 잃고 내 가슴은 찢어졌으니

  나 죽을병에 걸렸네.

 

  오늘 그는 나의 적

  어제는 나와 함께 했으나, 영원히 가까이 있으리라 했으나

  아 나의 신실한 연인이었던 그가

  나를 딱하다는 눈길로 쳐다보며 한숨을 짓누나

 

  이제 사랑은 적으로 돌변했어라.

  그리고  나는 버림받았어라. 아이고, 빈 몸이로다.

  그 마음 돌려보려고 돌려보려고

  애써 봤지만 헛수고구나.

  그러니 나 내 원수 때문에 죽을 것 같네.

  나 죽을병에 걸렸네.

     -전문-

 

 

  ♣ '프랑스의 여성시'를 소개하면서(발췌)_ 정과리/ 문학평론가

  문학의 기본 꼴이 서양 문학의 방식으로 재편된 이래, 즉 근대 이후의 한국 문학장에서, 프랑스의 시는 한국의 시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저 15세기의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으로부터,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폴 발레리를 거쳐, 얼마 전 작고한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에 이르기까지 수다한 시인들의 시가 한국시에 전사傳寫되어 창조의 영감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여성 시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치 프랑스에는 여성 시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그러나 그렇지 않다. 프랑스 문학이 라틴문학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한 꼴을 갖추게 된 것이 12세기 무렵인데, 이때 최초의 시인은 프랑스의 하급 귀족이었던 '앙리 플랑티쥬네', 즉 헨리 2세가 통치하던 영국 궁정에서 활동한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여성 시인은 꾸준히 출현하여 장구한 자율적인 문학사를 형성해 왔다.

  우리는 오늘 프랑스의 여성 시인들을 일람함으로써 그동안의 무지와 편견에서 해방되는 첫걸음을 내딛고자 한다. 시기는 중세에서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이며, 시인들의 수는 31인이고, 시편은 모두 48편이다. 이들은 프랑스 여성에 의해 씌어진 시들의 아주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적 독자들에게 알려진 시인들을 중심으로 선한 것이다.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들은 처음 그 향기를 맡아보는, 썩 두터운 다발의 언어의 '푸른 장미'가 될 것이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한두 사람 정도 이름을 들어봤을 뿐, 직접 읽는 경험은 이 자리가 '첫'인 경구가 대부분이라고 하겠다.

  (···)

  각 시인들의 신원과 문학 세계, 그리고 시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정보는 훗날 단행본으로 묶일 기회가 있을 때 보충하고자 한다. 우선은 언어 그 자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숨결을 호흡하시길! (p. 시 173-174/ 론 167-168 (···) 169)

 

   ---------------------

   * 『시사사』 2020-겨울(104)호 <프랑스 여성시-중세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에서

   * 정과리/ 1958년 대전 출생,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조세희론」으로 입선하여 평단에 나옴, 저서 『문학, 존재의 변증법』(1985), 『스밈과 짜임』(1988), 『글숨의 광합성』(2009)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