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나의 근작시

책-펫

검지 정숙자 2020. 11. 20. 23:35

   

    책-pet

 

    정숙자

 

 

  그림자와 나, 단둘이 걷는다

 

  가로등과 나무들과 넷이 걷는다

  아니지, 어둠도 있지, 다섯이 걷는다

 

  막 스며드는 겨울과 낙엽과 핏기 잃은 토막-, 여섯이 걷는다.

  (‘걸어간다가 아니고, ‘걷는다라고 흘린 까닭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야.)

 

  몸무게가 빠져나간 발자국만이 따라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바스러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몸무게가 빠져나갔다면 날아와야 할 게 아닌가.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몸무게가 실린 동안만 발자국은 살아있는 거였어. 몸무게가 빠져나가는 순간 발자국은 주검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나는, 나는 걷고 있구나. 순간순간의 주검을 잊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잇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딛고 풍장 되겠지. 언젠가는- 나도- 누구라도 종말은 풍장이고말고.)

 

  나무도, 풀도, 바위도 그렇게 마른 피로 부스러져

 

  바람에 휩쓸리는 바람이 되고 말 테지

 

  기습적인 칼은 이길 수 없다

  어느 땐가를, 전후를 돌아볼 틈도 없이

 

  소리쳐 그리워할 대상을 잃고

  그림자와 나, 단둘이 걷는다

 

  그래, 그런데도 난 혼자가 아니다

  (책을 읽는 한 혼자 사는 것도, 혼자 눕는 것도 아니다.)

 

  책과 책들과 함께 하는 한

  바람 우짖는 거리에서도 나는 solo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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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시학』 2020-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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