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pet
정숙자
그림자와 나, 단둘이 걷는다
가로등과 나무들과 넷이 걷는다
아니지, 어둠도 있지, 다섯이 걷는다
막 스며드는 겨울과 낙엽과 핏기 잃은 토막-달, 여섯이 걷는다.
(‘걸어간다’가 아니고, ‘걷는다’라고 흘린 까닭은 목적지가 없기 때문이야.)
몸무게가 빠져나간 발자국만이 따라오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바스러진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몸무게가 빠져나갔다면 날아와야 할 게 아닌가.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야. 몸무게가 실린 동안만 발자국은 살아있는 거였어. 몸무게가 빠져나가는 순간 발자국은 주검이 되는 거였어. 그런데 나는, 나는 걷고 있구나. 순간순간의 주검을 잊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잇고- 순간순간의 주검을 딛고… 풍장 되겠지. 언젠가는- 나도- 누구라도 종말은 풍장이고말고.)
나무도, 풀도, 바위도 그렇게 마른 피로 부스러져
바람에 휩쓸리는 바람이 되고 말 테지
기습적인 칼은 이길 수 없다
어느 땐가를, 전후를 돌아볼 틈도 없이
소리쳐 그리워할 대상을 잃고
그림자와 나, 단둘이 걷는다
그래, 그런데도 난 혼자가 아니다
(책을 읽는 한 혼자 사는 것도, 혼자 눕는 것도 아니다.)
책과 책들과 함께 하는 한
바람 우짖는 거리에서도 나는 solo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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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시학』 2020-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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